[김현주 더봄] 존재하는 것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아야겠어요
[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한옥마을에서 만난 미디어 아트 현재의 보존에 대해 생각해 보다
나이가 들면 꽃이 예쁘고, 나무가 좋고, 마당 있는 옛집이 그립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면서 항상 그 자리에 그렇게 있던 것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아름다움을 놓치고 지내온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봄, 여름 지나 가을, 겨울이 되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 마주하는 주변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감탄하게 된다. 골목길을, 둘레길을, 조금 더 애를 써 등산로를 오르는 건 그런 이유다.
산책이 즐거운 내가 요즘 자주 다니는 곳은 인왕산 아랫동네 서촌과 북촌이다. 지난주에도 이 두 동네를 다녀오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롭고 고즈넉한 한옥을 오가며 사라져가는 소중한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시간이 됐다.
며칠의 휴일이 있었던 10월 첫 주 서촌으로 향했다. 서촌과 북촌의 한옥에서 전시, 투어, 체험, 공연 등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는 복합문화행사 ‘서울한옥위크’(9월 27일~10월 6일)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관심 있었던 건 한옥 10곳에서 현대미술 작가 10인 작품을 소개하는 '공간의 공명' 전이었다. 전시의 제목처럼 한옥이란 공간과 그곳에 놓인 예술 작품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할지 궁금했다.
전시는 난호재와 호경재 등 민간 한옥과 서울시가 운영하는 공공 한옥들에서 열렸는데, 각각 북촌 5곳과 서촌 5곳이었다. 지도에 그려진 표시를 따라 골목길에서 골목길로 산책하듯 움직이며 관람하는 재미가 있었다. 가구·공예(곽철안, 김기드온, 류지안), 회화·조각(김영주, 연여인, 이유, 홍순용), 설치(김선희), 미디어·영상(박재훈), 사진(이현준)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다양한 분야 작가들의 작품을 부드럽고 넉넉한 한옥 안에서 감상하니 갤러리에서 마주했을 때와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서촌 상촌재에 전시된 박재훈 작가의 미디어 작품은 특별한 감상 경험이 됐다. 박재훈 작가는 포인트 클라우드와 사진측량 기술을 이용해 현실의 사물을 직접 3D 데이터로 만들거나 이미 만들어진 데이터를 수집한 후 그것을 가공하고 분해하고 재조합해 다시 가상의 디지털 공간에 배치하는 작업을 한다.
창문과 가구 사이에 놓인 형광등(형광등 그린 120/형광등 레드 120)과 촛불(촛불 폭발/촛불 눈물), 반다지 위 석양을 담은 스크린 ‘하루의 끝’처럼 위트 있는 작품도 있었고 큰 얼음덩어리가 천천히 움직이는 ‘마지막 빙하’처럼 순간적으로 각성을 하게 만드는 작품도 있었다. 아름답지만 역설적으로 편하게만 볼 수는 없는 작가의 작품들은 한옥이어서 오히려 도드라졌다.
며칠 뒤에는 가회동에 들를 일이 생겨 진작부터 가보려 했던 전시 ‘대지의 메아리: 살아 있는 아카이브’(12월 8일까지)를 보러 갔다. 전통과 현대의 경계를 허무는 예술공간을 지향하며 지난달 오픈한 ‘푸트라 서울(FUTURA SEOUL)’도 궁금했고, 세계적인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Refik Anadol)’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도 놓칠 수 없었다.
‘기계가 자연을 꿈꿀 때 어떤 모습일까?’라는 전시장에 적힌 도발적 문구대로 생성형 AI 모델로 자연을 구현한 작품들이 거대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자연에 특화해 직접 개발한 오픈소스 AI 모델(대규모자연모델, LNM)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심화할 수 있는 다중 감각 작업의 창작이 가능했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런던 자연사 박물관, 아마존과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등에서 수집한 대량의 자연 이미지와 소리를 인공지능으로 데이터화시켜 미디어 아트로 구현했다.
AI를 도구로 삼아 추상의 단어인 자연을 현재의 이미지로 구체화하는 이 작업은 자연을 더 깊게 이해하고 지구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생태계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와 노력이 담겨 있다. 이를 기록하고 감상하기 위해 활용한 AI모델의 잠재력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작품을 보는 내내 그 소재가 된 자연이 언제까지 우리 곁에 남아 있을지 의문이 들었고, 화면 속 압도하는 컬러와 형태의 이 이미지들이 어쩌면 내가 앞으로 화면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은 아닐지 안타까웠다. 더 이상 가질 수 없기에 소중하게 담아둔 기억 속 사진처럼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이 경이로운 자연이 데이터로만 기억돼서는 안 되는데, 가장 아름다운 계절에 앞선 걱정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