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철의 무대리뷰] 정명훈, 여인의 사랑과 죽음을 연주하다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호소력 짙은 프리마 돈나의 열창이 돋보여

2024-10-06     한형철 초빙기자

콘서트 오페라는 무대장치, 의상 등을 생략하고 기악과 성악 연주에 집중하여 오페라 전곡을 연주하는 공연 형식이다. 그렇기에 오페라 공연 시 오케스트라 피트에 숨어있던 오케스트라가 무대 위에 자리 잡는다. 이 방식은 지휘자의 음악적 해석과 가수의 성악 표현을 강조하므로, 관객은 시각 요소를 제거하고 오로지 연주와 노래를 집중하여 감상할 수 있다.

<춘희>로 알려지기도 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이탈리아 작곡가 베르디가 1853년 베네치아의 명문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한 작품이다. 오페라를 초연한 바로 그 극장의 오케스트라를 정명훈이 지휘하여 콘서트 오페라로 10월 4일 무대에 올렸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소설이 원작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는 19세기 파리 상류사회의 쾌락에 탐닉하는 모습과 이중 윤리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뒤마 피스는 당시 유명한 사교계 여성(코르티잔, 유력자의 스폰을 받는 관계)과 사귀었고, 베르디 또한 미혼모 소프라노와 동거하면서 주위의 우려와 비난을 받았다. 작가와 작곡가가 사회윤리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낀 상태에서 코르티잔을 소재로 삼은 사랑과 죽음의 명 스토리가 탄생한 것이다.

지휘봉이 아니라 마음으로 지휘한 마에스트로 정명훈 /사진=예술의전당 제공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오페라 악보를 외운 채(암보) 포디움에 올랐다. 그 정도로 이 작품에 빠져들었다는 증표이다. 암보가 지휘자의 실력이나 덕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 대한 완벽한 통찰로 인해 지휘가 더 정교하고 해석은 자유로워질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카라얀이나 아바도를 기억하는 것도 눈 감고 지휘에 몰두하는 모습 아니던가. 

역시 정명훈은 자유롭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때론 고요하게 때론 폭발하듯 온몸을 휘저으면서. 공연이 끝난 후에 단원들은 발을 구르며 그에게 신뢰와 존경의 마음을 드러냈다. 깊이 있는 해석과 섬세한 표현력으로 라 페니체 극장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는 하나가 되었다. 

<라 트라비아타>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잘나가는 사교계의 여성(비올레타)이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남자(알프레도)와 사랑에 빠지지만 가문을 중요시하는 남자 아버지(제르몽)의 회유로 말없이 떠나간다. 사랑을 배신했다고 오해한 남자는 여자를 모욕하고, 한참 뒤에 진실을 알고 달려오지만 여자는 병이 깊어 그의 품에서 죽는다. 

사랑하는 이를 돈으로 모욕하는 장면(라 페니체 극장 오케스트라, 지휘 정명훈) /사진=에술의전당 제공

비올레타 역의 올가 페레티아트코는 호소력 깊고 다양한 창법의 열창이 돋보였다. 1막에서 사랑 고백을 받은 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애쓰는 아리아 ‘언제나 자유롭게(Sempre libera)’로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2막의 알프레도에게 모욕을 당한 뒤에 언젠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것을 기대하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처연한 심경을 잘 표현했다.

3막에서 병이 깊어 죽기 전에 알프레도를 그리워하며 부른 ‘안녕, 지난 날이여(Addio, del passato)’는 그녀의 기교를 모두 담은 노래였다. 목관악기는 그녀를 위로하듯 말을 건네고, 그녀는 연인을 그리워하며 누에고치가 명주실을 자아내듯 아픔을 노래했다. 비올레타의 사랑이 안타까워 나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알프레도 역의 존 오스본은 매력적이고 넉넉한 성량으로 공연장을 채웠다. 다만 음색도 연기가 필요한데, 1막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는 설렘과 흥분이, 2막에 사랑을 얻어 함께 생활하는 아리아에는 행복감이 묻어나지 않아 다소 아쉬웠다. 물론 안정된 보이스는 충분히 매력 있었다.

강형규는 가문을 지키려는 아버지 제르몽을 인상 깊게 표현했다. 묵직하면서도 귀에 또렷하게 꽂히는 딕션(발성)으로 아들을 위한 아비의 애정을 절절하게 관객에게 전달했고, 관객들은 환호로 답했다. 

노이 오페라 코러스(지휘 박용규)는 무대 뒤에서 오케스트라와 가수의 노래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해 주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은 지휘봉보다는 마음으로 지휘하는 듯 모든 연주를 자연스럽게 하나로 이끌었다. 

올해 파리 오페라 발레단 갈라와 로열오페라하우스의 <오텔로> 등 굵직한 공연을 기획한 예술의전당이 이후 어떠한 무대를 펼칠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