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마디 더봄] '유니폼'은 어떻게 탄생됐나···더미북 전시 '아홉 더미' 이야기
[윤마디의 유니폼] 그림 속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주고 묶어줘 이 과정을 그대로 건져 올려 책으로 묶었다 읽는 사람이 자기만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도록 질문하는 법···그 법을 찾아 다듬어 나가는 것
안녕하세요. 윤마디입니다.
여성경제신문에 연재 중인 '유니폼'이 어떻게 제작되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어서 두 번째 소개 글을 준비했어요. 지난 글로 썼던 '유니폼'의 시작이 된 일본 여행에 이은 더미북 전시 이야기입니다. 참 감사한 이벤트였어요. 이 전시를 통해 '유니폼'을 기획하고 원고 초안을 만들 수 있었거든요.
올해 3월 여성경제신문에 '유니폼'을 연재하기 전, 2월에 이태원에 있는 갤러리 '아트스토리 자리'에서 동료 작가님들과 더미북 전시를 열었습니다.
<아홉 더미>는 아홉 명 작가가 펼치는 더미북 전시. 더미북(dummy book)이란 가제본을 뜻하는 용어입니다. 더미북 제작은 책 모양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에, 그림책을 만들 때 작가들은 여러 권의 더미북을 만들며 작업을 보완하곤 합니다. 더미북은 완성된 책 이전에 불완전한 단계이지만 한편으론 작가의 생각과 이야기를 러프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작업 특성상 소수의 사람 외에 공개되지 않는 이 과정을 이번 전시에서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모호하고 순수한 몸짓을 공유함으로써 자유롭고 즐겁게 소통하는 자리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아직 책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시작되었습니다. (Copyright. MIA)
작년 11월 일본에 다녀와서 ‘드로잉북 정리해야지~’ 하던 게 친한 그림책 작가님 눈에 띄고 여덟 분의 작가님들과 닿아 동료가 되었습니다. '작은 ZINE'이라는 모임 이름처럼 각자만의 작은 진(잡지)을 목표로 잡고 격주로 온라인 오프라인에서 모여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두 달쯤 지나 일정상 중반쯤 왔을 때 우연히 전시 기회가 생겼어요. 완성까지는 멀었지만 좋은 기회라서 놓치고 싶지 않았지요.
이 시점에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까? 바로 우리가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모습, 이 자체를 보여주고 싶다고 뜻이 모아졌어요. 각자 어디선가 데려온 생각 꾸러미가 책 모양을 갖춰가는 과정을 보여주자고요. 전시 이름을 <아홉 더미>로 지으면서 당시 딱 우리 상태인 작업 과정을 보여주게 되었고, 그 작업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로서의 정체성도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처음 여행 드로잉을 가지고 '작은 ZINE'을 만들어야겠다 했을 땐 낱장을 모아서 날짜별로, 지역별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제가 평소와 다르게 사람을 많이 그렸다는 게 눈에 띄더라고요.
저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던 걸까? 누구를 위한 걸까? 저 사람이 여기 있어서 이 공간은 어떤 의미가 생기는 걸까? 그런 물음에 검정 물감을 녹여서 사람들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다시 만나러 가서 붙들고 물어보기 전에는 들을 수 없는데 어차피 못 그럴 테니까. 그냥 저는 제 자리에서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리다 보니 그림 속 사람들이 시선에서, 자세에서, 위치에서 답을 보내왔습니다.
분량이 꽤 쌓여갈 때쯤, 하루는 작가님들 앞에 쫙 펼쳐놓고 보니까 그림 속 사람들이 이야기를 풀어주고 묶어주는 것이 보였습니다. 짐을 이고 진 사람, 땅을 보는 사람, 하늘을 닦는 사람, 그림자가 된 사람, 말뚝처럼 땅에 발을 박아놓은 사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 건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이야기는 다음 장으로 다음 장으로 흘렀습니다.
이 과정을 그대로 건져 올려 차곡차곡 겹쳐서 투박한 책을 묶었습니다.
처음엔 단순하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림에서 글을 만들고, 글에서 그림을 만들고, 서로 이어 붙여 분량을 만들면 책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모임을 거듭하면서 동료 작가님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 참 좋아서, 그걸 제 작업에 어떻게 녹여낼지 연구하다 보니 - 책을 만든다는 건 나의 사유를 독자와 어떻게 소통할지 연구하는 과정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전시장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인 다른 작가님들의 과정도 보았습니다. 다른 이의 더미북 속 그림이 이번엔 독자가 된 저에게 또 질문하고 있었습니다. 이거 느껴져요? 어떤 기억이 떠올라요? 손안에 움켜쥐었던 묵직함 혹은 홀연함, 뺨으로 느껴지는 햇살, 공기, 냄새, 그런 게 기억나나요? 그 시절 당신은 무엇에 열중하고 있었나요, 오히려 어떤 일에 눈을 돌리는 데 열중하고 있었나요?
그림이 나에게 질문했듯 이렇게 독자에게도 질문해야 하는구나.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하지? 읽는 사람이 자기만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도록 질문하는 법. 그 질문을 찾아 다듬어 나가는 것이 '유니폼'을 통해 제가 하고 싶은 일이란 걸 알았습니다.
저는 언제나 바라왔었거든요. 저는 짜잔! 하는 데는 재주가 없으니 하다 보면 되는, 하다 보면 어느새 엥? 되어있는 그런 작업을 하고 싶다고요. 그래서 마디라는 이름도 지었었지요. 행복이 종착지에 있는 게 아니라 가는 길 마디마디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그리고 행복을 찾지 않아도 되지, 내가 찾는 게 뭐든 가는 길 마디마디에 있는 걸 아는 삶을 살자고.
'유니폼'을 통해 책으로 가는 마디마디를 지나고 있답니다.
그럼 '유니폼' 2탄 교토 편. 다음 마디로 이어갈게요.
지난 전시 이야기는 인스타그램 '아트스토리 자리(www.instagram.com/art_story_zari)'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