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의 충실의무' 고려아연 분쟁에 등장···국민연금은 발 묶여
법 개정 없이도 영풍·MBK 최윤범 위협 미국과 달리 韓 경영 판단 '안전항' 없어
고려아연과 영풍그룹 간 경영권 분쟁이 '이사의 충실의무' 법리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다. 영풍은 20일 고려아연 회계장부 열람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최윤범 회장이 대표이사로서의 선관주의 의무를 위반했다며 주주권 행사에 나선 셈이다.
상법 제466조에 따르면 발행주식의 총수의 100분의 3 이상에 해당하는 주식을 가진 주주는 이유를 붙인 서면으로 회계의 장부와 서류의 열람 또는 등사를 청구할 수 있으며 회사는 청구의 부당성을 증명하지 못하면 이를 거부할 수 없다.
현행법은 이사의 충실 의무에 주주를 포함하지 않고도 수임자의무(fiduciary duty) 위반 여부를 따질 수 있는 구조다.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하여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는 상법 제382조의 3은 '이사와 회사 간의 이해가 충돌할 때 회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할 의무'를 뜻한다.
지배주주 이익 침해론을 앞세운 영풍의 공세에 직면한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올해부터는 사내이사 직만 유지)의 방어 논리는 경영판단의 원칙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영풍과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이 SM엔터테인먼트 주가조작에 연루된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문제를 지적한 것에 대해 의사결정 과정에서 관련 법령 및 내규 절차를 정상적으로 거쳤다면 면책이 될 수 있다.
다만 '안전항(safe harbor)' 또는 '책임에 대한 피난처(shield against liability)' 등으로 비유되는 경영판단의 원칙에 따른 면책은 미국에서 판례법으로 인정되지만 국내에선 '이사의 충실의무' 규정에 입각해 주주에 대한 이익 침해 여부를 우선적으로 따지는 경향이 크다.
영풍그룹의 전방위 공세에 고려아연은 우군 확보가 급선무다. 현재 개별 지분율로 보면 영풍그룹에 이어 2대 주주는 7.57% 지분을 보유한 국민연금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국민연금은 영풍그룹과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이 격화하기 직전 투자의 목적을 변경했다.
국민연금은 지난 3월 주주총회 직전 고려아연 지분 보유 목적을 '일반 투자'에서 '단순 투자'로 변경하면서 월스트리트 룰에 입각한 차익 실현이 고려아연 투자 목적인 것을 분명히 했다. 기존의 '일반 투자'로 보고하면 의결권 행사를 통해 △임원의 선임과 해임 △정관변경 △보수 산정 △배당 확대 △임원 위법행위에 대한 해임 청구권 행사 등을 요구하며 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데도 주주권을 포기한 셈이다.
이 때문에 국민연금은 2대 주주이지만 영풍그룹과 고려아연 어느 쪽 손도 들어줄 수 없는 중립 입장이 됐다. 재계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과거 국민연금은 한라공조 경영권 분쟁 당시 소액주주의 요구에 부응해 한라공조의 우군으로 공개매수에 참전한 바가 있는데 이번에는 단순 투자로 목적으로 공시한 터라 국민연금의 역할을 기대하긴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MBK파트너스가 밝힌 공개매수 규모는 지분율로 6.98∼14.61%다. 고려아연 지분은 최윤범 회장 측 우호지분을 포함해 33.99%다. 영풍과 장형진 고문 측 33.13%에 더해 MBK가 14.6%의 지분을 확보하면 영풍그룹 우호 지분은 총 47.7%까지 늘어난다. 의결권이 없는 자사주 제외 시 52%를 확보해 경영권을 갖는다.
영풍그룹와 특수관계를 해소한 최 회장이 대항 공개매수에 나설 경우 MBK파트너스 제안(66만원)보다 더 높은 가격과 더 많은 물량(144만5036주)이 필요하다.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통한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중립 포지션을 취하며 1조원대 실탄을 자력으로 마련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