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요양시장 진출 잰걸음에 요양업계 "골목상권 침해"
시장 진출 대기업, 기존 사업자와 갈등 정부 역할과 공익성 확보 필요성 대두
같은 김치찌개라도 어떤 김치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이다. 조리사마다 방법이 다르고 선호하는 손님이 달라진다. 백년 가게 혹은 원조라는 이름이 붙은 특색있는 음식점이 이젠 잘 보이지 않는다. 골목마다 같은 브랜드 즉 프랜차이즈가 널렸고 '손맛'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기계맛'으로 대체됐다.
일명 '골목상권' 침범. 자본력 그리고 대량 생산을 갖춘 대기업이 영세 개인사업자로 구성된 영역에 발을 들이면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초고령화 사회 진입이 1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장기 요양 업계에서도 대기업 자본의 시장 진출을 우려하는 시선이 나온다.
8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장기 요양기관 운영 주체는 2019년 기준 개인이 75.6%대를 차지한다. 비영리법인 21.8%, 영리법인 2.5%로 개인 운영 기관이 월등히 많다. 음식점으로 보면 '프랜차이즈'가 극소수라는 얘기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은 혼자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에게 제공되는 사회보장제도다. 최대 20%의 본인 부담금만 내면 요양 등급 판정을 받고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2008년 도입된 이 제도는 당시 민간이 운영하게끔 도입됐다. 일정 자격 조건을 갖춘 인원이 설립 허가를 받으면 시설을 운영할 수 있다. 노인요양원, 방문요양센터, 주야간보호센터 등으로 운영된다. 요양원은 '시설급여', 방문요양센터·주야간보호센터는 '재가급여'다. 이들 시설 중 대다수가 개인 혹은 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KB, 대교, 종근당 등 이름이 널리 알려진 '대기업'이 업계에 발을 들여 논란이다. 기존 장기 요양 업계에서 '골목 상권 침해'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지난해 10월 기준 서울 지역에는 KB골든라이프케어 위례빌리지(정원 101명)와 서초빌리지(정원 68명), 종근당산업의 벨포레스트(정원 56명) 요양시설이 있다. 재가시설인 KB골든라이프케어 위례케어센터(정원 21명)와 강동케어센터(정원 49명)가 있다. 경기에는 하나금융공익재단의 하나케어센터(정원 99명)가 있다.
대기업이란 이점을 활용한 시장 진출에 대해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KB골든라이프의 경우 월 이용료만 200만~300만원 수준, 그래도 기꺼이 지불하고 요양 서비스를 받겠다는 입소 대기자가 500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존 개인사업자 혹은 법인은 난색을 보인다. 권태엽 한국노인복지중앙회 회장은 여성경제신문과 통화에서 "복지를 경제 논리로 접근하면 안 된다"고 했다. 이어 "대기업은 관심조차 없는 분야였지만 초고령화 시대를 앞두고 '돈이 된다'는 개념으로 복지계에 발을 들이겠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장기 요양 시장이 '돈이 된다'는 인식은 수급자 추이가 급격히 증가한 데 따른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장기 요양 서비스 이용자는 2008년 14만1696명에서 2021년 86만9678명으로 증가했다. 장기 요양 인정자의 8.8%(2021년 12월 말 기준)만 장기 요양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것으로 집계됐다.
권태엽 회장은 "국가는 국민이 건강하게 나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밑그림을 그려야 하고 실무는 복지 전문 시설이 맡아야 한다"며 "의료 지출을 사전에 줄일 수 있도록 전문성이 강조된 기관이 요양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어 "자본력에 기대 복지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개념은 위험하다"고 덧붙였다.
정치권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남인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금까지 정부가 제대로 하지 못한 돌봄의 역할을 민간 영역에서 해왔는데, 대자본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되면 기존의 민간 시설들은 피해가 명약관화하다"면서 "대기업으로부터 골목상권을 보호하듯 기존에 애써 온 민간의 영세한 복지기관들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장기 요양은 원래 민간 영역
정부 개입 공익성 확보해야
국가가 개입해 장기 요양 영역에서의 공익성 확보가 절실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대기업의 요양 산업 진출에 따른 기존 시장과의 대립을 중앙 정부가 중재할 필요가 있다는 것.
특히 수도권으로의 인구 쏠림 현상에 따른 중소도시 요양 서비스 공백을 국가가 책임지고 막아야 한다는 지적이 학계에도 나온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 인터뷰에서 "민간 자본이 요양 영역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면서도 "당초 노인장기요양보험의 설계가 민간이 들어올 수 있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자체가 시설급여 및 재가급여의 공익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 요양 센터를 설립하는 등 노력해야 한다"며 "특히 중소 도시의 장기 요양 공백이 심각한 상황에서 민간이 이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지자체의 개입을 통해 서비스 공백을 최소화할 필요도 있다"고 제언했다.
대기업의 시장 진출이 장기 요양 서비스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는 지적도 전문가 집단에서 나온다.
이미진 건국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난 4월 22일 국회 대회의실에서 열린 장기 요양시설 임차허용 위험에 대한 토론회에서 "장기 요양보험시장에서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대규모 금융자본은 임차허용 방식으로 손쉽게 요양원을 단기간에 개설 확장할 수 있고 대도시 지역에만 시설을 설치하거나 기존 시설을 인수하는 방식으로 시장지배력을 확대할 것"이라며 "이윤극대화를 추구하는 전략으로 장기적으로 서비스 품질이 저하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보험 업계에서는 임차 허용을 통해 보험사의 요양업 진출이 확대되면 장기 요양 서비스 질적 개선, 대도심 요양시설 공급 부족 해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보험사와 같은 대기업 자본이 들어오는 것은 오히려 서비스 질 향상 측면에서 바람직한 일"이라며 "정부가 시장 안정성을 담보할 안전장치를 마련해 책임감 있게 사업하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고령층을 중심으로 장기 요양보험의 요양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대부분 요양시설은 소규모 개인사업자 중심으로 시설투자나 우수 인력 확보가 미흡한 등 서비스 관리에 한계가 있다. 노인 계층 니즈가 변화하고 있으나 이에 부합하는 맞춤형 서비스 제공은 미흡한데 이를 민간 자본이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