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준 더봄] 은퇴의 자유와 낭만을 쭈욱~ 누리는 비결은?
[최익준의 낭만밖엔 난 몰라] 호기심을 놓지 않는 용기, 나답지 않은 것을 인정하는 겸손의 힘
성공한 CEO의 평판을 뒤로하고, 자발적 은퇴를 감행한 지 벌써 햇수로 2년 차에 들어섭니다.
회사를 떠날 때 후배 동료들에게 경조사 말고는 서로 연락하지 말자고, 과거의 인연에 구애받지 말고 각자 새로운 현실과 성장에 충실하자고 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나 제가 잘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에게 공유할 겸 달라진 오늘 하루 일상들을 정리해 봅니다.
1. 아침에 눈 뜨면 창문 커튼을 열어젖혀 먼 하늘을 바라보며 복식의 쉼 호흡을 합니다. (은퇴 전에는 눈을 뜨면 출근 준비, 아침 면도와 옷매무새에 온 정신이 팔려 있었지요.)
2. 양손으로 볼짝을 꼬집으며 갓 잡은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내 심신이 펄떡이며 퍼렇게 살아 있음을 확인합니다.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건강하니 감사합니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기지개를 쭈욱 켭니다.
3. 생수 한 잔에 유산균 한 알 가볍게 털어 넣고 아침 식사로 사과 한 쪽과 바나나 한 잎 베어 먹으며 KBS 아침 클래식 음악을 들으니 벌써 웃음이 귀에 걸리기 시작합니다.
4. 어제 하루를 복기하며 '나의 언행이 주변 사람들을 배려했는가?' 그리고 '나의 언행이 주변 누군가에게 조그만 상처가 되지 않았을까?' 오늘의 첫 질문을 시작합니다.
5. 오늘 하루 나를 포함한 주변 사람들과 (천성적으로 다정하지는 못해도) 나누고 배려하도록 무엇을 해야 할까 생각하며 내 하루의 일정과 약속을 챙겨 봅니다.
6. 특별한 일 없는 날의 오전에는 1~2km 수영을 하거나, 기분에 따라 새로 생긴 진흙 산책로 공원에서 맨발 걷기 하는 철학자가 되어 봅니다. 운동 중에 오늘 무엇을 쓰고 읽을지에 대한 생각을 가만히 천천히 정리해 봅니다.
7. 점심을 먹기 전에 오늘의 체중, 혈압 그리고 혈당을 확인합니다. 세 가지 측정치에 따라 오늘의 식사량과 추가할 운동량에 대한 계획을 스스로 잡아 봅니다.
8. 지난 일 년 오후 시간에 그림을 그리고 전람회를 틈틈이 다니긴 했지요. 그림을 시작한 지 몇 개월 후 미술을 전공한 친구는 저의 초보 그림 몇 점을 보고는 "그다지 재능은 보이지 않으니 그냥 취미 삼아 그리든지 말든지···." 솔직한 평가를 듣고 열정이 식어서인지 요즘은 나를 설레게 하던 그림으로부터 손을 놓고 휴업 중이랍니다.
예술적 감각과 기질을 가지고 부족한 재능을 짧은 시간 안에 메꾸기엔 부족하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나니 제 마음이 훨씬 편해졌지요. 열심히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는 것과 내 부족한 재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그림을 통해 깨달았으니, 이 얼마나 큰 통찰의 기쁨일지요?
9. 지난봄, 집 앞 하얀 목련이 활짝 피고 벚꽃이 바람에 실려 비행할 때였습니다.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공공 도서관의 독서클럽에 새내기로 가입하여 매주 한 권의 책을 정독하고 토론하기 시작했지요. 마치 학생으로 되돌아간 기쁨을 되찾아 가고 있답니다. 경영 자문과 코칭의 일을 하는 틈틈이 독서 일기를 쓰고 정해진 책을 매주 한 권씩 읽습니다. 독서토론회 정회원으로 승격하려면 밤잠을 설치며 완독해야 하는 자발적 고난의 시간을 기꺼이 즐기는 나를 발견하는 요즘의 나날들입니다.
올해 여름은 19세기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의 장편 소설 <죄와 벌> 문장들을 다시 꺼내 읽기에 몰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무 살 적에 읽었던 소설의 주인공인 대학생 '라스콜니코프'에게 동년배의 결핍과 연민을 느꼈다면, 지금의 나는 그의 아버지뻘이 되어 자식 같은 그의 내면과 정황을 읽어 내며 사회 제도의 모순과 빈부격차의 심화는 개인과 사회를 병들게 함을 통찰합니다.
지금 AI(인공지능)의 시대에 폭력과 살인이 온전히 정당화될 수 없는 사회로 가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의 사회적 고민을 하면서 깊어져 가는 독서의 여름밤에 죄와 벌을 노래하는 매미 소리를 듣습니다.
10. 한 달에 불과 하루이기는 하지만 노숙자 쉼터에서 밥 짓기와 설거지 봉사를 시작했습니다. 식사하기 위해 찾아온 분들은 예수님의 형제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할 형제들이라는 신부님의 말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틈틈이 봉사와 소액 기부의 참맛도 알게 되었습니다. 성씨가 다르고 혈육이 다른 이들의 배고픔과 아픔을 줄이는 참여의 노력이야말로 나를 비워 내고 공존의 길로 들어서는 새 기쁨을 주니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 내성적인 내 수줍음을 버리지 못하여 식사 하러 오신 분들께 충분히 살갑게 대하지 못함을 고민합니다.
11. 여성경제신문 [더봄]에 정기적으로 기고할 에세이 준비와 마감에 쫓기기는 하지만 기고를 하고 나면 한 가지를 이룬 기분이 나를 기쁘게 합니다. 이번 가을부터 다른 문예지에도 글을 실어도 보고 출판도 기획해 보려 합니다.
12. 끝으로, 일주일에 최소 이틀은 내 경험과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분들과 수입에 관계없이 일을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 중에 규모와 관계없이 경영의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 때문에 앞길이 보이지 않거나, 경영 코칭을 받기엔 예산이 부족한 분이나 기업은 여성경제신문사에 연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낭만에 대한 글을 쓰면서 스무 살 시절의 내가 나에게 돌아온 듯한 설렘의 하루를 선물 받은 가치를 어떻게 돈으로 따질 수 있는가 말이지요.
13. 요즘은 청년 시절 내가 즐겨 듣던 CD들을 서재에서 찾아내 듣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답니다. 오늘은 장거리 운전하는 길에 스모키(Smokie) 밴드그룹의 'What can I do'를 틀어놓고 목청껏 따라 부르며 실빗집에서 젓가락 장단으로 함께 불렀던 친구에게 카톡으로 이 노래를 공유했지요. 노래를 들은 친구로부터 "주말에 만나 밴드를 새로 결성하자"는 답글이 왔습니다.
14.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세상은 여전히 넓고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밥을 나누러 가는 길, 도서관 가는 길, 일하러 가는 길에 스모키(Smokie)의 이 노래 한 곡을 들을 때마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의 기운을 듬뿍 받은 제 기분은 풍선처럼 화악 달아오릅니다. What can I do? and What can I do? I will start all over again 오오~ 활짝 핀 우리들의 젊음을 다시 불태우리라 내 친구여, 낭만밖엔 난 몰라~
(이상 저의 소식과 근황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