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의 역습] ② '상대적 빈곤감'이란 상처···중산층 왜 右에서 左로 갔나
중산층에 대한 눈높이 높아지면서 스스로 '하위층'이라 생각하기 시작
| 보수 정당이 연이은 총선 참패로 실의에 빠졌다. 중산층이 무너진 상황을 간과한 탓이다. 한국 사회를 떠받치는 중추 세력인 이들은 진보 정당 손을 들어줬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에 이어 부동산 가격 폭등은 가처분 소득(실소득) 급감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당정 갈등은 판을 뒤흔드는 큰 변수가 되지 못했다. 생활물가 급등에 따른 불만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취임 2주년을 맞은 윤석열 대통령도 "봄은 깊어 가는데 민생의 어려움은 쉬 풀리지 않아 마음이 무겁고 송구스럽다"며 국정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에 여성경제신문이 정치·이념·경제·정책 관점에서 계층구조의 변화를 살펴보고 새롭게 재편된 질서에 맞는 정부의 역할을 따져본다. [편집자 주] |
국민의힘이 20대, 21대, 22대 총선에서 연속으로 참패를 당했다. 원인은 다양하지만 경제적 계층 구조 변화로 인한 중산층의 붕괴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특히 IMF 금융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부동산값 폭등을 겪으면서 중산층은 스스로가 하위층이라는 절망에 사로잡혔다. 여당은 이러한 중산층의 믿음을 얻지 못했고 이는 선거 참패로 이어졌다.
16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의 계층 구조가 급변한 분기점은 1997년 IMF 외환위기다. 1970~1980년 개발연대에 비해 절대 빈곤은 크게 줄었으나 상대적 빈곤은 늘어난 현상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다. 결국 보수당을 지탱해 온 중산층의 민심은 시간이 갈수록 이탈했다. (※관련 기사 : [중도의 역습] ① 보수, 집토끼 중산층을 진보에 내주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 결과 1997년 9.7%에 머물던 빈곤층은 1998년과 1999년 상반기에 각각 17.6%, 17.8%의 비율로 증가했지만 중산층의 비율은 감소, 중하층의 비율은 증가했다. 개발연대 70%에 육박할 정도였던 중산층 비중이 1997년(64.8%) 이후 8년간 5.3% 감소했고 하위층은 3.7%, 상위층은 1.7% 증가했다(삼성경제연구소)는 분석도 있다.
한국은행이 최근 발표한 '실업 경험이 가계소비에 미치는 장기 효과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충격에 따른 대규모 실업 경험이 상흔 소비(scarred consumption) 현상으로 나타났다. 상흔 소비는 거시 경제적 쇼크가 흉터로 남아 가계소비가 줄어든 상태를 지속하는 현상이다. 실제로 가계소비는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이전 추세를 하회한 후 장기간 원래 추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소득과 자산이 적은 계층을 중심으로 상흔 소비가 두드러졌다. 과거 실업 경험에 따른 소비자의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소득 전망은 중장기 가계소비를 감소시킨다. 지출을 줄이고 저축을 늘리면 미래에 더 많은 부(wealth)를 축적할 수도 있지만 경제 구조적 측면에서는 치유할 수 없는 상흔으로 남아 실질 가계 소비는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실제 중산층 기준 6348원인데
심리적 중산층 기준 8232만원
한국의 실질 가계소비 증가율은 1971~1997년 연평균 20.3%에서, 1998~2008년에는 7.1%, 2009~2021년엔 3.5%로 지속 둔화했다. 2019년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 등으로 가계 소비가 많이 감소한 후 회복되는 조짐을 보였으나 최근 들어 다시 부진한 3%대로 돌아왔다.
중산층의 가계부채가 쌓이고 지갑이 얇아진 반면 부유층은 실업 경험에도 불구하고 소비를 줄이지 않았다. 부의 양극화는 심화했고 계층 이동 가능성도 하락했다. 연구 결과에서 소득 기준 중산층 비중은 늘어나고 있지만 스스로 중산층이라 생각하는 '심리적 중산층'은 오히려 줄어든 이유다.
IMF 위기 이전엔 중산층이라고 믿는 국민들의 비율이 60%를 넘었다. 1988년 경제기획원의 사회통계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 60%가 중산층 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1987년에 비해 8%나 증가한 수치였다. 1989년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국민의 75%가 중산층이라고 응답했다.
통계청 가계동향 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활용해 균등화 처분가능소득을 기준으로 매년 4분기 중산층(중위소득 75% 이상~200% 미만) 비중을 확인한 결과 2019년 61.4%에서 2023년 62.3%로 4년 새 0.9%포인트 늘어났다. 하지만 민간 기관(NH투자증권)이 발간한 '중산층 보고서'에서는 2022년 중산층(OECD 기준)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절반에 가까운 45.6%가 자신을 ‘하위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김정식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IMF 이후 부의 불평등이 심해짐에 따라 계층 간의 사다리가 붕괴하면서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고 이를 포기하게 된 것은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IMF 이후 부동산 가격을 비롯해 부의 불평등이 심해짐에 따라 계층 상승 이동이 더욱 어려워지고 상류층과의 격차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부의 불평등의 심화는 중산층에 대한 국민 잣대를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다. NH투자증권 보고서가 우리나라 중산층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연 8232만원(4인 가구), 월 소비 427만원(4인 가구), 순자산 기준으로 9억4000만원(4인 가구)은 있어야 중산층이라는 인식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각각 2021년 우리나라 가구소득 상위 24%, 우리나라 가구 상위 9.4%, 우리나라 가구 순자산 상위 11% 수준으로 실제 현실과 비교해 중산층에 대한 눈높이가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사용하는 국제적 중산층 기준은 '중위소득의 75∼200%'이다. 중위소득 75% 아래면 저소득층, 200% 위면 고소득층이다. 한국은행·통계청 등이 함께 조사·발표하는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토대로 파악된 우리나라 개인당 중위소득은 3174만원(2021년 기준)이다. 그러면 중위소득의 200%는 6348만원이 되는데 심리적 중산층 기준과 2000만원 가까이 차이가 난다.
계층 이동 사다리 붕괴, 정치 지형 영향
尹 정부 경제정책 중산층 지지 얻지 못해
단기 처방 아닌 구조 개혁으로 해결해야
중산층의 붕괴와 절망은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산층은 예로부터 보수가 우위를 점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적 기반이었으나 계층 이동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 줄어들면서 진보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었다.
방송 3사의 비례대표 투표 정당 출구 조사에서 중산층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40대들이 진보 정당을 더 지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번 22대 총선에서 40대는 70.7%(더불어민주연합 32.5%, 조국혁신당 38.2%)가 50대는 63.6%(더불어민주연합 25.1%, 조국혁신당 38.5%)가 진보 정당을 지지했다.
윤석열 정부는 이번 총선에 맞춰 금융투자소득세(금투세) 폐지, 재개발·재건축 활성화, 기업 밸류업 등의 정책을 앞세웠다. 언뜻 투자자들이 바라는 정책으로 보이지만 '부자 감세'라는 프레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지속된 저성장과 양극화 사이에서 중산층의 마음을 얻는 데 부족했던 것이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코로나19와 이후 재난 지원금과 같은 현금성 지원 정책이 경제 활성화 효과가 있다고 내세워 대중의 공감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는 보수가 잃어버린 중산층의 지지를 얻으려면 결국 효과적인 경제 정책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현오석 전 경제부총리는 최근 칼럼을 통해 '바보야, 문제는 경제가 아니고 개혁이야'라고 지적한 바 있다. 현 총리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저성장이 계속돼 경제 주체가 성장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리고 축소 지향적 경제행위를 하게 되면 정책을 처방해도 약발마저 듣지 않는 '이력 효과(hysteresis)'가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저출산·고령화와 맞물려 한국 경제 주체들이 이 저성장에 익숙해지는 이력 효과가 우려되는 상황에선 단기 처방보다는 잠재성장률(노동이나 자본 등 자원을 최대로 활용하였을 때 달성 가능한 성장률)을 끌어올리는 구조개혁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구조개혁의 원래 취지는 사회나 조직에 누적된 비능률을 제거함으로써 전체의 활력을 되찾고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경제의 기본 원리를 되찾음으로써 경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다. 최승노 자유기업원 원장은 "윤석열 정권이 탄생한 이후로 노동 개혁 이슈가 나왔을 때 지지도가 높았으나 잘 해결하지 못했다. 경제 살리기 효과가 조금 미비했던 점이 있었다"며 "노동 관련된 부분을 비롯한 것들이 해소가 되면 지지율도 다시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중산층에 대한 눈높이가 과거보다 터무니없이 높아진 상황에서 무분별한 복지 정책을 펼치다가는 중산층을 더 달아나게 할 것이란 지적도 내놨다. 최 원장은 "옛날에는 복지 정책이 인기를 얻었으나 요즘에는 국민들이 현혹되지 않는다. 무조건 복지를 늘리자는 주장은 요즘 시대에 잘 맞지 않는 주장이기 때문에 정치인들도 잘 하지 않는다"라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