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 만에 나온 의대 증원 근거는 반쪽짜리···정부 자료 47건 부실 논란
배정위원회의 회의록·명단까지 빠져 있어 이병철 변호사 "자료 부실해 웃음 나와"
정부가 의대 증원 집행정지 항고심 재판부에 47건의 자료를 제출했으나 예고와는 다르게 배정위원회의 회의록뿐 아니라 명단까지 빠져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법부가 의대 증원의 근거를 따져보겠다고 나섰음에도 부실한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 이에 일각에서는 명단 익명 처리를 비롯해 법원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12일 의료계에 따르면 정부가 재판부의 요청에 따라 47건의 문건을 지난 10일 저녁 제출했으나 제출을 예고했던 배정 위원 명단이 누락된 상태였다. 앞서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의대 정원 배정위원회와 관련해 "자문기구에 불과하니 회의록 작성 의무는 없다. 다만 명단은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익명으로라도 소속 또는 신분을 표기해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의료계의 의대 정원 집행정지 소송을 대리하는 이병철 변호사(법무법인 찬종)는 "정부가 국민에게 한 약속을 어겼다. 대국민 사기를 친 것"이라고 날 세워 비판했다. "배정위 제1차 회의에 참석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고발당한 충북도청 공무원 역시 제출된 자료에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13일 오후 1시 의협 지하 1층 검증위 기자회견에서 질의응답을 하겠다"며 "이에 앞서 오전 10시에 정부 제출자료 전부를 기자들에게 배부하겠다"고 밝혔다.
서울고법 행정7부(재판장 구회근)는 의대 교수·전공의·의대생 등 18명이 보건복지부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낸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 항고심 심리에서 위와 같은 근거 자료를 5월 10일까지 제출하라고 요구했었다. 특히 재판부는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제도가 시행되기 전 엄격한 현장 실사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며 "인적·물적 시설 조사를 제대로 하고 의대 증원 분을 배정한 것인지, 어떻게 지원할 것인지, 예산이 있는지 등 현장 실사 자료와 관련 회의록을 제출하라"고 했었다.
법원이 과학적 근거자료 등을 제출하라고 명령한 이유는 지난 2개월 동안 정부 측이 제출한 수많은 증거자료에 과학적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전공의·의대생·의대 교수 측은 "정부가 무의미한 자료를 제출할 것으로 예상한다"며 "정부의 위 자료가 제출되면 이병철 변호사가 방송사에 출연해서 국민들 앞에 위의 자료들을 모두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에 정부는 재판부의 명령에 따라 △2000명 증원의 과학적 근거자료 △현장실사 등 조사자료 △배정위원회가 각 40개 대학에 세부적인 인원을 배정한 회의록 △근거자료 일체 △정부의 각 대학지원 방안 △세부적인 예산 계획을 제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정부가 의대 정원을 논의했다 주장하는 의료현안협의체 회의와 관련해서는 모두 보건복지부 보도 자료로 갈음했다. 제출한 회의 자료는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 심의 안건 및 회의록'과 '보건정책심의위원회 의사인력 전문위원회 회의 결과'뿐이다. 회의체 4곳 중 2곳 자료만 반쪽짜리로 제출한 것이다.
증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육환경 실사 자료는 의학교육점검반 활동 보고서란 이름으로 제출됐다. 이 변호사는 아직 자료를 공개할 수 없다면서도 "실사 자료 내용이 부실하기 그지없어 웃음이 나온다"는 반응이다.
실제로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의대 10곳 중 5곳은 현장 조사가 "전혀 없었다"며 심지어 1곳은 '줌(zoom)'을 통한 온라인 비대면 조사였다고 폭로한 바 있다. 나머지 4곳은 교육 전문 인력 없이 보건복지부 직원 1~2명이 기존에 제출한 서류를 확인하는 정도에서 그쳤다고 했다.
47건이나 되는 제출자료가 충실히 구성됐는지도 의문이 뒤따른다. 정부가 제출한 자료 목록을 보면 반절은 보건복지부 등 정부 측 보도자료와 보건의료노조 등 시민단체 성명서다. 보건복지부 보도자료만 10건이 포함됐고 언론 기사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보도자료, 국무조정실 보도자료 등 정부 측 보도자료 일색이다. 증원에 찬성하는 시민단체의 성명서는 보건의료노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한국소비자연맹,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 가입자단체 등 5건이 포함됐다.
재판부는 자료 제출 일주일 뒤인 5월 16일 목요일 또는 5월 17일 금요일에 판결하겠다고 날짜를 명시했다. 재판부가 요구하는 근거 자료 수준은 지난 2007~2008년 전국 41개 로스쿨 신청 대학의 인가와 개별 정원에 대한 최종 심의에 준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시 법학 교육위원회가 진행한 서류 심사에만 3주가 걸렸으며 현장실사 팀도 별도로 구성돼 10명으로 된 2개 팀이 3주간 대학을 직접 방문해 제출 서류와의 일치도와 시설물 등을 점검했다.
정부는 재판부가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대교협이 5월 말까지 심사를 진행해 확정하면 각 대학이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공고하는 방식으로 절차를 마무리 짓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전공의와 학생들 복귀는 물 건너가고 대학 병원은 몇 달 안에 파산하는 의료 붕괴가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과학적 근거가 부족해 재판부가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정부의 2000명 증원 처분, 각 40개 대학에 대한 배분 처분은 즉시 효력이 정지되고 본안소송(서울행정법원에서 진행)이 선고될 때까지 정부의 2000명 증원은 중단된다. 아울러 본안소송도 최소한 2년 이상 소요될 것으로 예상돼 윤석열 정부의 의대 증원은 물거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