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백일장] 언니! 풍덩 가자

제2회 해미백일장 강명둘 님 입상작

2024-05-09     최영은 기자
어르신들과 산책 전 벚나무 앞에서 /강명둘

저는 경상북도 경주시 구정동에 소재한 사회복지법인 나자레원 명화의 집에 근무하고 있는 요양 보호사 강명둘입니다. 이곳은 노인 전문 요양원으로 치매, 중풍 어르신들이 생활하는 곳입니다. 저희 시설 앞마당에는 어르신들이 사계절 산책을 즐기는 아담한 벚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봄에는 벚꽃이 아름드리 피어 어르신들의 고향을 생각나게 만듭니다. 꽃이 다 지고 잎이 무성해지면 다시 어르신들은 보리 내음 그윽한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꽃만큼이나 예쁜 단풍이 물든 가을에는 풍성한 고향 들녘을 생각나게 합니다.

앙상한 가지 사이로 주름살을 헤며 또다시 한 해를 보내는 겨울에서 봄을 기다리는 어르신들은 이 나무가 고향 같습니다. 저희는 이 나무 밑에서 어르신들과 같이 사진도 찍고 봄에는 파전을 가을에는 누런 호박전을 부쳐드리며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만들어드립니다.

그런데 유난히 고향을 그리워하고 못 잊어 하는 어르신이 한 분 계십니다. 거동은 자유로우나 치매가 심하시어 실내를 다니시며 모든 남성분을 오빠라 부르고 여성분을 성(언니)이라고 부릅니다. 어르신의 고향은 황해도 안악군 은흥면 광천리 풍덩마을(해주와 평양 사이)이며 고향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기와집이 세 채나 있어 큰 부자라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요 ‘고향의 봄’ 노래를 부르시며 고향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아침 인사와 함께 눈만 마주치면 "성! 풍덩 가자, 성! 풍덩 가자, 성! 풍덩 언제가?" 하시며 “안악군 은흥면 광천리 풍덩이야”라며 주소를 줄줄 외우시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풍덩 가자”라는 말씀을 하셔서 그때마다 “네 할머니! 내일 우리 풍덩 가요”라고 해드리면 “어. 그래! 내일 풍덩 가지”라고 하시던 환한 그 표정이 무척이나 고왔는데 지금은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치매는 점점 더 심해져 갔고 기억력도 흐려져 갔으며 식사도 스스로 못 하시며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시고 기저귀를 착용하셨습니다. 또한 언어도 상실한 채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 풍덩도 점점 잊혀 갔습니다.

어르신께서 즐겨 부르시던 ‘고향의 봄’도 잊은 채 지금은 아무것도 하시지 못하고 와상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습니다. 손가락이 짓물러질 정도로 빨고 아기처럼 공갈 젖꼭지를 입에 물고 껌벅거리시는 그 눈 속에서 할머니의 고향 ‘풍덩’을 그려봅니다.

“할머니! 지금 봄이 왔어요. 꿈에 그리시던 고향 ‘풍덩’에도 봄이 왔겠지요. 할머님이 즐겨 부르시던 ‘고향의 봄’처럼 냇가에 수양버들이 춤을 추고 아기 진달래가 활짝 피었겠지요. 할머니! 우리 내일 풍덩 가요”라고 귓전에 속삭여드립니다.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시던 어느 날 어르신께서는 영원한 고향으로 가셨습니다. 이후 계절이 바뀔 때면 아담한 벚나무 사이로 어르신 얼굴을 떠올리며 ‘풍덩’의 풍경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