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봄날 로맨틱 데이트는 예술에 흠뻑, 어때요?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미술관에서 문학관까지 뿌듯하게 충전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가진 인생의 전부 온 생애를 바쳐 하고싶은 것을 찾으셨나요
로맨틱한 데이트 하면 떠올리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흐릿하고 잔잔한 조명 아래 와인잔을 기울이는 것, 함께 팝콘을 나눠 먹으며 알콩달콩 게임을 하는 것, 손잡고 산책, 지갑과 심장이 모두 떨리는 쇼핑과 맛집 찾아다니는 먹방도 있겠지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겠지만 제가 추천하는 코스는 미술관입니다. 가까운 곳에는 숲이 있고 노출 콘크리트 건물과 흐르는 물로 폭포를 떠올리도록 지어진 멋스러운 장소가 남원에 있더군요. 시립김병종미술관이예요.
사랑과 예술은 따라다니기 마련이죠? 사랑의 도시 남원에는 예술의 기운이 넘칩니다. 사랑의 테마로 이뤄진 공원 춘향테마파크에 자리한 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새삼 깨달았습니다. 남원 출신 김병종 화백은 고향 사랑이 남달랐던 것 같아요. 남원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가까이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 그의 대표 작품 400점 이상을 남원시에 기증했습니다.
김병종의 기증 작품을 바탕으로 소장품을 확보한 남원시는 미술관 건립을 추진하여 2018년에 시립미술관으로 개관했어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초기작부터 최근 작품까지 다수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면서 특별 기획전을 마련하여 시민들이 폭넓게 관람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김병종은 특히 글 쓰는 화가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대학 시절에 전국대학미술대전에서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동시에 동아일보, 중앙일보 신춘문예에까지 당선 되었으니 글과 그림의 경계를 넘나들며 일찌감치 전방위적인 예술가의 행보를 보인 분이십니다.
경계와 시대를 넘는 위대한 예술가들은 서로를 알아보는 법일까요? 김병종 화백을 알기 훨씬 전 <혼불>의 작가 최명희 선생의 팬이었던 저는 몇 년 전 남원의 혼불문학관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최명희 선생이 예술을 향한 깊은 열망과 헌신에 관하여, 끊임없는 예술의 경지를 탐구하는 문제를 가지고 어떤 분과 주고받은 서신을 보고 감동을 하였어요.
그런데 그 대상자가 바로 김병종 화백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남원을 배경으로 한 <혼불>을 쓴 작가와 남원 출신의 화백이 지고지순한 예술 사랑의 주제로 수많은 서신을 주고받았더군요. 전시실에서 두 사람의 육필 서신을 읽으며 그 순수함과 진지함으로 양 팔에 작은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무래도 혼불문학관에 다시 한번 가야겠다고 결심해 봅니다. 말씀드린것 처럼 혼불문학관도 남원에 있습니다.
김병종 화백의 작품이 좋아서도 그러하지만 미술관의 건축물 자체에 반해서 남원에 올 때마다 찾게 되는 김병종 미술관인데요. 때마다 전시의 주제가 다르고 보는 작품이 다르니 익숙한 듯 늘 새로워 언제나 만족스럽습니다.
지금 미술관의 전시의 주제는 <일상>입니다. 2024년 전북도립미술관 시·군 공립미술관 공동 기획전 <일상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전부> 전시가 5월 26일까지 무료로 진행됩니다. 전시회의 주제 '일상이 우리가 가진 인생의 전부'는 체코의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말에서 따온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 전시의 표제어가 마음을 잡아당기면 끝난 게임이 아닐까요? 1층부터 회화와 조각, 사진까지 여유 있게 작품을 관람하면서 둘 사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데이트를 권하고 싶습니다.
전시 관람 시작하기 전에 미술관 카페 '미안'에 들르는 것은 위험한 일이에요. 넓은 창으로 보는 미술관 풍경은 그림 같아서 바라보다가 시간을 뭉텅 잃기 쉽습니다. 서가에는 김병종 화가가 기증한 저서들이 가득하고 커피와 음료뿐 아니라 맛있는 빵과 와플 같은 디저트와 함께 커피 마시며 야외 테라스에 파라솔 아래 앉아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되더군요. 커피가 너무 맛있어서 미안한, 그래서 미안 카페라 이름지은 미술관 1층 커피 장소가 참 좋았습니다. 혼자 앉아 책을 읽으며 힐링하는 사람도 있지만 두 손을 마주 잡고 앉아 눈을 맞추는 데이트족이 유독 눈에 띄더군요.
혼불문학관
대하소설 <혼불>은 제게는 참 좋은 책이었지만 동시에 읽기 힘든 책이었습니다. 남원의 유서 깊은 종갓집 양반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무너져 가는 모습을 그린 내용도 그러했지만 작가 최명희가 고르고 골라 쓴 치밀하고 섬세한 우리 민속말이 얼마나 낯설던지요.
신분제도가 엄격했던 시대의 봉건 문화 속에서 대를 이어가는 종가의 며느리들 3대의 모습과 신분 해방을 꿈꾸는 민초들의 갈등과 애환을 보여주는 인물은 모두가 살아 내 옆에 있는 것처럼 생기 넘치고 생동합니다. 혼에 깃든 생명의 불을 모두 태우듯 제게는 부담스럽기도 한 그런 책이었어요.
최명희 작가가 1980년 4월부터 1996년 12월까지 무려 17년 동안 동아일보와 신동아에 연재하면서 쓴 대하소설입니다. 작가는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하고 죽어 <혼불>은 미완인 채 10권의 책으로 남았지만 소설의 배경이 된 노봉마을에 세워진 문학관을 갈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한국인 최명희의 <혼불>은 책의 부제 ‘꽃심을 지닌 땅’처럼 그곳을 찾는 방문객에 의해, 읽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말이죠.
문학관은 한옥으로 지어진 전시관입니다. 생전 작가의 집필실이 재현되어 있고 그가 사용하던 만년필, 원고지, 편지, 심지어 커피잔도 놓여있어 당장이라도 최명희 작가가 그 공간 속으로 들어와 글을 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전시관 안에는 소설 속에 묘사된 당시의 생활상과 풍속사를 떠올릴 수 있도록 축소 모형으로 구현해 두어 책을 읽은 독자라면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문학관으로 오르면 지형을 살펴보는 감동도 크지요. 노봉서원, 청호저수지, 새암바위, 호성암, 노적봉 마애불상, 달맞이 동산, 서도역, 근심바위, 늦바위 고개, 무당집, 홍송 숲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실제로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문학관 초입에 세워진 바위에 새겨진 글 '천추락만세향'은 소설 속 청암부인이 청호지를 두고 묘사한 대목인데요, ‘천 번의 가을 동안 즐겁고 만세에 걸쳐 복을 누리는 땅'이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바위 앞에 서면 청호 저수지가 보입니다. 다만 지금은 정비공사 중이라 문학적 흥취는 조금 덜하죠.
문학관에 전시된 원고와 교정지, 편지, 인터뷰 영상을 통해 작가를 느끼는 것만큼이나 장소 자체가 주는 아름다움으로 로맨틱, 의미 있는 데이트가 될 거예요. 문학관의 너른 잔디마당과 한적한 곳에 들어앉은 한옥의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는 두 사람을 더 가깝게 해줄 것입니다. 저는 저와 데이트를 했습니다.
최명희 선생이 ‘원고를 쓰는 일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만 같다’고 했어요. 나는 그 절절한 심경을 십분의 일이라도 헤아릴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선생의 마음을 가늠할 길이 없으니 아마도 혼불문학관을 다시 또다시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올 때마다 조금도 덜하지 않게 자신을 갈고 생애를 전부 바쳐 언어와 그 혼을 길어내고 싶었다던 작가의 혼불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미술관에 문학관까지 모처럼 예술에 흠뻑 빠져 보내고 나니 어둑어둑 해졌습니다. 남원에 왔으니 추어탕이라도 따스하게 한 그릇 먹으려 합니다. 데이트에 추어탕이라니 안 어울린다고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와 데이트하실 때 깨작깨작 어렵게 먹는 건 딱 금지랍니다. 뜨끈하고 시원하게 추어탕 국밥으로 든든히 먹는 것이 오늘 예술데이트의 화룡점정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