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당신은 못 말리는 땡벌

[송미옥의 살다보면2] 제 몸보다 더 큰 화분을 매달고 돌아와 쓰러진 일벌 보니 분홍집 여사가 열무 농사하랬다고 애쓰던 남편 생각이···

2024-04-07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꽃에 취해 길을 잃었나~ 꽃이 피면 백 리 길도 달려오는 벌. 지인의 농장에서 /송미옥

봄이 왔다. 마당엔 꽃들이 앞다투어 봉오리를 터트리고 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벌들은 꽃향기에 취해 정신을 못 차리고 여기저기 콕콕 쑤시며 돌아친다.

벌을 보노라니 벌 키우는 집 마당에서 본 풍경이 생각난다. 한 녀석이 제 몸무게보다 더 큰 화분을 양발에 매달고 돌아와 벌통 입구에 짐을 털더니 벌러덩 쓰러졌다. 열심히 노동한 일벌의 생애에 감동이 왔다.

그런데 죽은 줄 알았던 그 녀석이 잠시 후 일어나 벌벌 기어 제 집으로 들어간다. 이번엔 가장의 애환을 보는 것 같아 뭉클한데 한 지인이 수컷의 열정을 일상에 엮어 흉을 보니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박장대소했다.

텃밭에 퇴비를 뿌리고 밭고랑을 만지고 있으려니 큰 수술을 하고 서서히 회복 중인 80대 어르신 부부가 운동 가다가 들어오신다. 얼른 커피 한 잔을 타서 대접한다. 어른이 팔을 걷더니 삽을 달라고 한다. 할머니가 입을 실룩이며 웃었다.

오래전, 시한부 판정을 받은 남편은 모든 걸 체념하고 좋아하는 술이나 실컷 마시겠다며 앞의 글에 소개한 분홍집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700고지 산꼭대기 집에서 가계까지는 5㎞ 정도 되었다.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불안한 나날이었다.

음주 운전으로 논두렁 아래로 차를 굴린 이후 키를 숨겨 놓았더니 가끔은 걸어서 오르내렸다. 처음엔 열두 번도 넘게 쉬는 것 같더니 점점 더 빨라졌다.

고흥만 유채밭에서 /송미옥

다음 해, 정이 든 동네 사람들이 경매 나온 땅을 소개해 주어 땅이 생겼다. 그것도 2000평(약 6611㎡)이나. 동네 사람들이 훈수를 두었다. 사과나무를 심어, 고추가 돈이 돼, 울타리 쳐서 염소를 길러 등등. 농사에 문외한인 우리는 팔랑귀가 되어 한쪽 귀퉁이에 금을 긋고 사과나무를 조금 심고 누가 또 뭐라 하면 또 금을 긋고 고추를 심고 말뚝을 박아 염소까지 키웠다.

하루는 분홍집 여사가 일거리를 제안했다. 토종 열무 씨앗을 줄 테니 잘 길러서 갖고 오면 열무 비빔밥은 물론이고 판매도 해줄 거라고 한 거다. 평생 책은커녕 문자도 안 하는 그는 어디서 <새농민> 책을 얻어와 열심히 탐독했다. 채소를 밥상에 올리면 짜증을 버럭 내던 사람이 언제부터 채소를 좋아했다고 저리 설레발을 치는지···.

본인 의지로 하는 거라 며칠 동안 곡괭이 하나로 파고 쪼고 해서 대충 정리해 놓더니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이웃이 고장 난 관리기를 고쳐서 쓰라며 갖다주었다. 로터리로 바꿔 끼워 조금 손을 보니 바로 작동이 되었다. 열무 덕분에 무의미하게 술 마시러 가는 외출이 아닌 공식적인 외출이 시작되었다. 퇴비 사러, 비료 사러, 휘발유 사러 오르내렸다. 열무 씨앗 가지러 내려갔다가 빈손으로 올라오더니 다음 날 다시 내려가서 갖고 왔다. 이웃들이 석회를 준다고 불러내고 토양 살충제도 뿌려야 한다고 해서 또 내려갔다.

드디어 열무 씨를 뿌리는 날, 분홍집 술 동기들이 길가에 앉아 한마디씩 했다.

“소부, 소부. (골이 좁다)”

“너븐디? (골이 넓은 거 같다)”

"임형, 쉬었다 합시다요~"

겨우 한 고랑 마쳤는데 고새(그 사이)를 틈타 불러제꼈다. 윗동네 동지가 막걸리 세 병과 쪽파를 똘똘이(외발 리어카)에 싣고 내려왔다. 뭔 큰일을 한다고 나에게 중참을 만들란다. 입을 열자나 빼 물고 칼국수와 쪽파 부침개를 해주니 지나가는 사람, 앞 밭 감자 심는 인부들을 모두 불러 함께 먹는다. 열무 두 고랑 심는데 아까운 돈이 십만 원도 넘게 들어가고 오르내린 차 기름값은 또 얼마인가. 열무가 난다 해도 겁난다. 개나리 신발끈 시베리아허스키~ 온갖 욕이 입안에서 랩 음악처럼 돌았다.

활짝 핀 고흥만의 벚꽃 /송미옥

속이 상해서 방안에 틀어박혀 있노라니 이웃 어르신이 들어왔다.

“죽을 뻔한 사람이 저리 설치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얼라(아기)나 서방이나 칭얼대지 않고 혼자 잘 놀면 가만히 냅둬. 우리 영감 몇 년째 저리 누워 있으니 얼마나 측은한가, 눈뜬 송장이지."

꽃을 찾아 어디든 달려가고 꽃향기에 취해 잠시 기절할지라도 내일이면 또 꽃을 찾아 날아야 벌이다. 내일 곧 죽을지라도 이성을 느끼고 감성을 느낀다면 살아 있는 거다. 큰 병을 이겨낸 영감이 대견한 듯 안 어른은 나에게 삽을 건네주라고 눈짓하며 옆구리를 찔렀다.

( 2006년 4월 어느 날의 일기장을 보며 추억에 젖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