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인생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 영화 ‘피아노’의 피하(Piha) 해변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자동차로 45분 원시의 생명 늪과 숲을 걸어 폭포까지 모든 것을 걸고 쟁취하는 삶에 관하여

2024-02-29     박재희 작가
피하(Piha) 해변의 일몰 /게티이미지뱅크

“손가락을 자른다고 될 일이야?”

이웃 남자와 아내의 성애 사실을 알고 질투와 분노에 휘말린 남편은 도끼로 아내의 손가락을 자른다. 다시 남자를 만난다면 손가락 모두를 하나씩 잘라버리겠다고 선언하면서. 제인 캄피온의 영화 <피아노>에 나오는 장면이다. 불륜이라는 단어로만 정의하기 힘든, 존재를 바꾸는 운명적 사랑이란 과연 행운인가에 대하여 논하던 중에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나와 다른 말을 했더랬다.

“손가락 하나 가지고 될 일이야?”

손가락을 자른다고 막을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는 나와 그래봐야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불륜이라는 친구가 서로 다른 의견을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피가 뿜는 손을 감싸고 휘청이던 주인공 여자를 빨아들이던 늪과 같던 진흙땅과 원시 고사리 나무로 빼곡했던 숲, 끝이 보이지 않게 너른 검은 모래 해변은 결코 잊히지 않는다. 

인생 영화 중 하나로 꼽는 <피아노>의 층위는 단순하지 않다. 여섯 살에 말하기를 스스로 중단한 여자 주인공 에이다는 치마를 부풀리는 크리놀린(crinoline)까지 받쳐입던 시대, 19세기의 여성이다. 아홉 살 된 사생아 딸이 있는 미혼모, 당당하고 밝은 그녀는 영국에서 식민지 뉴질랜드까지 무겁고 시끄럽고 거추장스러운 최고급 명품 피아노를 가져간다.

피하 해변에 다녀온 후 영화 '피아노'를 다시 보았다. '피아노'의 한 장면 /사진=박재희 캡처

모든 영화적 장치가 상징하는 바가 복합적이다. 섬세하고 매혹적인 영화를 완성하는 것은 역시 무엇보다도 2시간 내내 화면을 채우는 풍경이었다. 너무나 생경하고 두려울 정도로 원시적이며 아름다워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특히 첫 장면, 마치 광야처럼 넓은 해변과 세상을 삼킬 듯이 달려드는 파도를 직접 마주하고 있는 광대한 해변은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뇌리에 남았다.

에이다는 스스로 가둔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통로이며 분신이었던 문명과 존재의 상징이던 피아노를 새로운 삶을 선택하면서 바다에 수장시킨다. 그 바다에 가보리라 다짐했던 것이 30년 전이다. 소망 하나를 이루기 위해 이른 오후, 오클랜드 서쪽 해안으로 향했다.

피하(Piha)는 뱃머리에 부딪히는 파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사자바위 형상의 언덕이 배처럼 바다를 마주한 자리에서 파도를 만나고 있다. 피하까지 가는 길은 구불구불한 도로가 이어져 운전하기엔 까다로웠다. 계속되는 구불길을 한참 오르다가 마지막 산을 넘을 때 오클랜드의 동해안을 보고 돌아 내려가면 드디어 서해안이 펼쳐졌다. 전망대에 서서 피하 비치 전체를 보니 당장 내려가 닿고 싶은 마음이 급해진다. 

단단한 모래가 광야처럼 펼쳐진 해변을 걸어 바다로 향했다. 거세고 높은 파도를 마주 보며 한참을 걸어도 바닷물이 발바닥, 발목을 겨우 넘는다. 거짓말처럼 넓어 광활하기까지 한 해변, 동그마니 피아노가 놓여있던 그 해변이다.

피하 해변(Piha beach)의 검은 모래사장 /게티이미지뱅크

작은 점처럼 멀리 선 사람들은 파도를 타고 있었다. 마치 깊어지지 않을 것처럼 수면이 낮은 바다가 한참 이어져 사나운 파도가 몰려오고 끌어당기는 바다 뒤로 사라졌다. 길고 깊숙이 낮은 수면으로 펼쳐지는 바다에 높고 거센 파도로 서퍼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해변이면서 동시에 뉴질랜드에서 가장 사망사고가 많은 위험한 곳이기도 하다.

거래처럼 이루어진 결혼으로 도착한 여인 에이다가 딸 플로라, 피아노와 함께 남편 스튜어트, 그리고 그의 이웃이자 친구인 베인스를 처음 만나던 해변을 걸었다. 에이다를 보며 '생각보다 너무 왜소하다'고 실망한 스튜어트가 의견을 묻자 베인스는 ‘피곤해 보이는군’이라고 말했던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대상을 자기 잣대로 평가하는 시각과 항해로 지친 사람을 그대로 알아보는 눈을 가진 두 사람을 상징하며 셋의 관계가 어떻게 펼쳐질지 예고했던 대사를 떠올리며 발가락 사이로 차가운 바닷물이 살랑거리는 모래사장을 걸었다. 

제인 캄피온 감독의 영화 '피아노' /사진=google 제공

영화에서 숲은 진흙 펄 오르막이었는데 보드워크로 잘 정비되어 있다. 30분여 편안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키테키테 폭포와 물웅덩이가 나타난다. 2월은 뉴질랜드의 가을, 수영하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는 낮은 기온인데 시원하게 풍덩 몸을 담그는 사람들이 있었다.

말할 수 없이 야성적이고 생명이 넘치며 미묘한 에로티시즘과 인간 생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 영화 <피아노>의 장면 장면을 하나씩 다시 소환하며 피하의 숲길을 걸어 내려왔다.

휘몰아치는 감정에 잊고 있던 허기가 들었는데 다행히 주차 공간 뒤쪽으로 피시앤칩스와 맥주를 파는 곳이 하나 있었다. 2층에 자리를 잡고 피아노가 도착했던 해변을, 피아노가 가라앉은 파도를, 새로운 존재로 건너간 바다를 바라보았다. 온전히 가라앉히고 새롭게 떠나갈 곳을 향해 일어설 때쯤 해변에 석양이 길게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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