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조금 늦어도 괜찮아
[송미옥의 살다보면2] 발달이 늦은 막냇손자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할머니 짱~짱' 하더니 부모를 만나자 변심했다
딸의 폰 번호가 뜨며 벨이 울린다. 귀가가 늦으니 막내를 좀 봐달라는 부탁 전화다. 지렁이체로 제 이름만 겨우 쓰는 아홉 살 셋째 손자는 또래보다 발달이 늦어 부모의 걱정이 크다. 집에 들어가니 형들은 학원 간다며 다 나가고 혼자 남아 불안한 마음을 표현하듯 TV 리모컨을 어찌나 빨리 돌려대는지 눈이 어지럽다. 아이가 안쓰러워 슬쩍 말을 걸었다.
“막둥아, 할머니랑 비행기 타고 여행 갈까?”
“네, 비행기 너무 좋아요.”
혼자 떨어져 본 적 없는 아이는 형이랑 같이 가는 거로 생각한다. 긴 방학이고 나도 2월까진 시간이 있어서 제주에서 일 년 살아보기 하는 친구에게 연락하니 놀러 오라며 여기저기 아이와 갈 만한 곳을 소개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듯 항공표를 예약했다. 그날 집으로 데려와 같이 짐을 싸는데 너무 좋아한다. 하필 겨울답지 않게 3일 내내 비가 온다는 예보다. 설마 비가 온다고 비행기가 안 뜨랴. 나이가 드니 막가파가 된다.
“엄마, 갑자기 왜?··· 애랑 대화가 안 될 텐데?··· 괜찮을까요?
급한 결정에 놀란 딸은 말을 더듬는다. 그러나 막내 돌보느라 큰애들에게 못 준 사랑도 나눌 겸 잠시라도 해방 기분에 걱정보다 기대가 더 크다.
출발하는 날, 하필 제주에 안개와 바람과 비가 단체로 들이쳐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심한 안개 때문에 많은 비행기가 하늘에서 몇 바퀴 돌며 착륙을 시도하다가 다시 회항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다행히 우리가 탄 비행기는 기적처럼 무사히 착륙했다.
아이랑 한라 테마파크에서 한나절을 보내고 서귀포 친구네로 건너갔다. 다음 날부터 박물관이랑 수영장이랑 아이가 좋아하는 재밌는 실내 놀잇감을 찾아 빗속을 뚫고 쫓아 다녔다. 아이는 사진을 찍을 때마다 활짝 웃었고 ‘할머니 너무 재밌어요’를 만발하였다. 가끔 엄마는? 하고 물었지만 깔깔 웃으며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걸 보니 재밌는 게 확실했다.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오늘 공항에 도착하니 3일 전보다 더 심한 난리다. 어젯밤과 오늘 오전 항공편이 모두 비와 안개와 눈사태로 결항이나 지연 상태다. 특히나 서울은 눈이 많이 내려 오전 운항이 거의 결항 처리되어 있다. 안내방송에 정신이 하나도 없고 사람들도 너무 많다.
아이가 불안해하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데 다행히 또 내 시간대(10시 30분)부터 정상 가동이다. 아이에게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폭우에도 하늘을 날듯이 평안해진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착하게 살겠습니다”라는 헛소리가 마구 나온다.
“할머니랑 여행하니 재미있었어?”
“네, 너무 재미있었어요.”
“할머니랑 다음에 또 갈까?”
“네, 할머니랑 다음에 또 가고 싶어요.”
조금 느리면 어때. 한국어 회화 이 정도면 백 점이지. 잘 크고 있는 거야. 어쩌면 경쟁 속에서 만들어진 정상이라는 표본은 많이 빠른 속도인지도 모른다.
아이와 함께 다시 버스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 나는 뿌듯하고 흐뭇했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온 가족이 마중 나와 호들갑을 떨며 아이를 안아 비벼댄다.
“어이쿠 내 새끼, 할머니랑 재미있게 놀았어?”
그런데···
‘할머니 짱~ 짱’을 외치던 녀석이 입을 삐죽거리며 울먹이듯 조용히 말했다.
“아니, 하나도 재미없었어. 할머니 싫어요.”
며칠 동안 가족을 떠나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참고 지낸 아이의 마음이 와 닿는다. 엄마 아빠와 형제들과 함께 웃고 울고 뒹굴고 으르렁대며 사는 것이 행복이란 걸 느꼈을까. 교육상의 지표엔 느린 발달이라지만 제 마음을 표현할 줄 알고 상대방의 마음까지 배려하고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아이가 기특하기만 하다.
조금 천천히 가는 것뿐이다. 비행기가 지연되어도 회항을 해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출발하면 조금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막냇손자와의 여행은 날씨 소란과 함께 공항에서 본 이·착륙 풍경까지 겹쳐 나에게도 진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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