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심 더봄] 이끼 마니아들의 천국 ‘오이라세 계류’···도호쿠 지방 1박2일 단체여행⑤

[양은심의 일본 열도 발도장 찍기](22) 도와다호의 ‘소녀상’과 ‘에비스·다이코쿠섬’ 1년 내내 물이 마르지 않아 ‘이끼들의 천국' 나무들과 오솔길, 물소리···힐링 타임 선사

2024-01-31     양은심 번역가(영상/책)·작가

도호쿠 지방 여행 1박2일. 마지막 날의 일정 중 하나가 내가 기대해 마지않았던 곳, 아오모리현(青森県)의 오이라세 계류(奥入瀬渓流)이다. 숲길 걷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혼자 걸어도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려서 지루하지 않다.

오전에 이와테현(岩手県)의 하치만타이(八幡平)를 걸은 후, 아키타현(秋田県)과 아오모리현(青森県)에 걸쳐 있는 도와다호(十和田湖)로 향했다. 도와다호는 약 20만 년 전 화산 활동에 의해서 만들어진 칼데라 호수다. 그곳에 긴 세월에 걸쳐 빗물이 모이고 모여서 아름다운 호수가 되었다.

점심시간에 맞춰서 도와다호에 도착했다. 메뉴는 아오모리현의 명물 요리 '도와다 삼겹살 구이(十和田バラ焼き)'이었다. 조용히 식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제 나 홀로 타임이다. 도와다 호수 산책 시작.

도와다 삼겹살 구이. 양파 위에 삼겹살을 올려서 익혀 먹는 요리다. /사진=양은심

'도와다 삼겹살 구이(十和田バラ焼き)'. 양파 위에 삼겹살을 올려서 익혀 먹는 요리이다. '구이'라는 이름이지만 굽는다는 느낌은 없다. 반쯤 먹은 후, 밥 위에 얹어서 덮밥처럼 해서 먹었다.

도와다 호수 둘레길 전체를 둘러볼 시간은 없어서 우선 유명한 ‘소녀상(乙女の像)’을 보기로 했다. 조금 걷기 시작하니 하늘색을 닮은 호수 안에 작은 섬이 보였다. 이름은 ‘에비스·다이코쿠섬(恵比寿·大黒島)’. 에비스섬과 다이코쿠섬이 나란히 붙어 있어서 마치 하나의 섬처럼 보이는 것이란다.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듯 빨갛게 물든 단풍나무가 곱다. 그리고 앙증맞은 빨간 지붕, 신사다. 어찌 저 작은 섬에 신사를 세울 생각을 했을까. 일본 사람들은 자연의 모든 것에서 신성(神性)을 찾아내고 일상의 무탈을 기원한다. 나 또한 언제부터인가 그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지진이 많은 일본에 오래 살아서일 수도 있고, 1만8000이 넘는 신이 존재한다는 제주의 풍토 안에서 나고 자라서일 수도 있지 싶다. 외할머니는 마당에 있는 돌멩이 하나 옮기는 일조차도 조심하셨더랬다. 아무 때나 집안에 못을 박지도 말라 하셨다.

작은 섬에 있는 소나무에 대한 안내판 앞에서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시끌벅적하다.

“약하고 강한 식물? 뭔 말이지?”

“약하지만 강하다는 뜻이지 뭐야.”

“아니 약한데 어떻게 강해?”

“약해 보여도 강하다는 뭐 그런 뜻 아닐까…”

그 설명에 납득을 했는지 그냥 넘어가자는 무언의 합의를 본 것인지 일행이 발길을 옮긴다.

안내판을 읽어 보았다. ‘약하고 강한 식물. 작은 섬에 있는 소나무가 보이십니까. 저런 바위섬이나 산등선 등 건조하고 환경조건이 나쁜 곳에는 다른 식물과의 생존 경쟁에는 ‘약하’지만 나쁜 환경에서도 잘 견뎌내는 ‘강한’ 적송과 일본오엽송이 자생하고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약하고 강하다.’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긴다’라는 의미이기보다는 ‘견뎌낸다’는 의미가 강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말을 듣는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꿋꿋이 견뎌내는 생명력. 버드나무가 강풍에 꺾이지 않고 살아남듯, 척박한 환경을 견뎌내는 강인함.

문득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사막에 데려다 놔도 잘 살 거 같아.” 나도 약하고 강한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발길을 옮겼다.

에비스·다이코쿠 섬. 약해 보이지만 강인한 적송과 일본오엽송이 자생하고 있다. /사진=양은심

드디어 '소녀상' 앞이다. 첫인상은(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감상임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중년을 상상하게 할 정도로 통통한 체격이어서 놀랐다. ‘소녀’라는 말에서 상상했던 ‘가녀림’은 없었다. 그야말로 힘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소녀상에 대해 알아보았다. 소녀상은 ‘시인이자 조각가인 다카무라 고타로(高村光太郎)의 마지막 작품으로, 1953년 도와다호 국립공원 지정 15주년을 기념해서 제작된 청동상이다. 1950년대라면 ‘소녀’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도 2020년대의 모습과는 달랐을 것이다. 가늘지 않은, 힘이 넘치는 소녀상에 납득이 갔다.

도쿄의 아틀리에에서 프로 모델을 기용하여, 1년 정도의 제작 기간을 거쳐 완성된 소녀상의 테마는 ‘도호쿠 지방의 자연을 이겨낼 힘이 넘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란다. 똑같은 동상이 왼손을 대고 마주 보고 있다.

소녀상의 얼굴이 조각가의 부인을 닮았다는 평이 많았단다. 그 말을 들은 조각가는 '그렇게 봐도 좋고 달리 보여도 좋지 않겠느냐'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소녀상의 테마는 ‘도호쿠 지방의 자연을 이겨낼 힘이 넘치는 아름다움을 가진 여성’이다. 똑같은 동상이 왼손을 맞대고 마주 보고 있다. /사진=양은심

도와다호를 뒤로 하고 향한 곳은 같은 아오모리현에 있는 오이라세 계류(奥入瀬渓流)다. 도와다호에서 시작하는 유일한 계류이며, 호수가 댐 역할을 하고 있어서 아무리 비가 와도 범람하는 일이 없고, 계류의 경사가 완만해서 1년 내내 흐르는 물의 양이 안정적이란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이끼가 많아서 이끼 연구가들에게도 인기라고 한다. 이끼를 전문으로 안내하는 가이드가 있을 정도라고.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이끼를 보러 오는 사람들은 흐린 날씨나 보슬비가 내리는 날을 좋아한단다.

오이라세 계류. 한 여행객이 계곡물을 만져보고 있다. /사진=양은심

버스 운전사가 걷기 시작하기 전에 보고 가라며 ‘초시 큰 폭포(銚子大滝)’에 데려가 주었다. 이곳까지 왔으니 사진이라도 찍고 가라는 배려였다. 버스가 대형이 아니라 중형이어서 가능한 일이란다.

실은 대형 버스가 아니어서 살짝 실망했었다. 아마도 다른 일행들도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그 실망이 이런 서프라이즈로 돌아오다니. 실망했던 것이 살짝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오이라세 계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과 차량이 지나가는 길을 정비하는 일 외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고 했다. 자연 그대로다. 버스를 오래 세워둘 수 없어서 서둘러 떠나야 했지만, 폭포의 분위기는 만끽할 수 있었다.

초시 큰 폭포. 울창한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양은심

예정되었던 출발 지점인 ‘아슈라노 나가레(阿修羅の流れ)’라는 곳에서 버스를 내렸다. 오이라세 계류의 중간 지점쯤에 있는데 물살이 하도 험해서 ‘아슈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단다. 잠시 파도처럼 출렁이는 물살을 구경한 후 바로 걷기 시작했다.

각자의 속도로 걸을 시간이다. 버스가 지나가는 길을 걸어도 되었지만 나는 계류에 딱 붙어있는 길을 택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좁은 길이다. 졸졸 흐르는 계곡물 바로 옆을 걸을 수 있다.

이런 길을 어디서 찾으리. 물소리를 들으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 들었다. 오솔길 같은 좁은 길과 물소리와 나, 그리고 나무들. 몸과 마음의 세포가 열리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힐링 타임. 쉼의 시간이다.

팬이 생길 정도로 고운 이끼. 나의 스마트폰 사진 실력으로는 이 정도가 한계였다. /사진=양은심

중간중간에 가느다랗게 보이는 폭포와 웅장한 암벽들이 등장한다. 고개를 들어 잠시 호흡을 고른다. 촉촉한 공기, 과연 이끼들이 좋아할 만하다. 길을 정비하는 데 쓰인 통나무에도 이끼가 가득하다. 게다가 이끼들이 이쁘기까지 하다.

이끼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도, 기회가 된다면 이끼 전문 가이드가 인솔하는 여행에 참여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까지라도 바라보고 싶어지는 풍경. 도와다호가 천연 댐 역할을 해서 1년 내내 계곡물의 양이 안정적이다. 폭우라 해도 범람하는 일이 없고, 가뭄이 들어도 계곡물이 마르는 일은 없단다. /사진=양은심

묵묵히 걷다 보니 어느새 집합 장소인 휴게소에 도착했다. 더 걷고 싶지만 이번엔 이것으로 만족해야지. 오이라세 계류는 총 14.5km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려면 5시간 반에서 6시간 정도 잡아야 한단다. 울창한 숲속에 계곡이 있고, 폭포가 있고, 암벽이 있고, 이끼가 있는 곳. 언젠가 처음부터 끝까지 걸을 날을 기대해 본다.

이제 도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이시케도(石ケ戸/イシケド. '케도'란 말은 '오두막'이란 뜻이다. 넓이 10㎡ 두께 1m나 되는 큰 바위가 계수나무에 걸쳐져서 바위 오두막을 만들고 있다. 옛날에 여자 해적이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사진=양은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