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 더봄] 방콕 후아타케 수상마을, 시간이 멈추었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은퇴 부부의 해외 한 달 살기-태국(최종) 수완나품 공항 근처 간단한 나들이 쇠락한 수상마을이 미술품 장터로
(지난 회에서 이어짐) 내일은 귀국하는 날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기 위해 수완나품 공항 근처 랏끄라방의 작은 호텔에 숙소를 잡았다. 오늘은 태국 여행의 마지막 느낌을 가방 속에 다독다독 챙겨 넣을 수 있는 간단한 나들이를 계획했다. 공항 동쪽으로 7km 정도 떨어진 후아타케(Hua Takhe) 수상마을이다. 이런 곳은 다녀온 사람들의 호들갑스러운 소개와 예쁜 사진 덕분에 관광객이 더 몰려 실제보다 과대평가 되곤 하는데, 구글에는 그저 '잔잔하고 좋다'라는 짧은 소개가 전부다. 큰 기대 없이 가보기로 했다.
같은 기온이어도 방콕은 치앙라이보다 훨씬 덥게 느껴진다. 덜컹거리며 무섭게 내달린 썽태우가 내려준 곳은 우돔플이라는 평범한 동네 시장, 여기를 통과하면 수로가 나온다. 프라웻 부리롬(Prawet Burirom) 운하다. 조용하게 흐르는 수로 건너편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목조건물들, 후아타케 마을이다. 수로 이쪽에는 그늘에서 젊은 친구 여럿이 모여 노는데, 한 친구는 바리깡으로 다른 이의 머리를 밀어주고 있다.
아치형 다리를 건너며 바라보는 운하 모습이 시원스럽다. 이 다리는 마을과 세상을 이어주는 지름길이라 주민들과 자전거와 오토바이가 수시로 지나다닌다. 양쪽으로 교행하기에는 좁아 위에 올라간 오토바이가 아래쪽에 뭐라고 소리친다. 딱 봐도 “네가 먼저 와!”다. 일단 다리 바로 아래 카페에 자리 잡고 땀을 식힌다. 오후 시간이 수로의 물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흐르는 듯하다.
이 다리와 그 앞의 작은 광장이 마을 어귀이자 랜드마크다. 그리고 수로와 나란히 목조건물로 지어진 수상 시장의 윤곽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옛날에는 배에서 물건을 싣고 내리고, 사람들은 이곳을 통해 바깥에 드나들고, 식당과 가게는 활력이 넘쳤을 것이다.
사실 어느 장소를 소개한답시고 샅샅이 보여주는 것도 일종의 스포일러이다. 그 이미지에 반해 찾아간 사람은 대체 어떤 감흥을 느끼란 건가. 하지만 오늘은 내가 그 악행을 범하기로 한다. 그런데 아무리 사진을 찍어봐도 밑에 잔잔히 깔린 느낌은 설명할 수 없다. 조용한 일상이 주는 선선함? 카피로선 약하지만, 이게 감정의 전부다.
마을 중간의 수로에서는 노인이 뭔가를 빨고, 초등학교에선 아이들이 영어 수업 중이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들어선 식당과 카페와 상점에서는 방문객들이 식사도 하고 구경도 한다.
이런 관광지의 매력은 현지인의 일상과 상업화가 조화를 이루는 정도에 달려 있다. 너무 붐벼도 싫고 너무 썰렁해도 실망스럽지 않던가. 어? 아주 예쁘게 생긴 경단, 10밧이다. 태국 음식이 그렇듯이 아주 달 테고, 찹쌀로 만들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완전 반가운 추억의 맛, 우리가 옛날에 먹던 그 핫도그다!
수로를 따라 시장과 마을이 형성된 지 100년 이상 되었는데, 시장 기능은 점차 상실되고 주민은 빠져나가 황폐해지자 주민과 미술대학생들이 나서서 미술품과 공예품 주말장터로 재건했다고 한다. 어쩐지 곳곳에 범상치 않은 설치물들이 보이더라니. 수로 주변의 빈 가게 터들은 전시 장소로 사용되는 곳이다.
우리나라 지자체마다 경쟁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향수 마케팅 또는 ‘추억의 거리’들과 비교하게 된다. 공감을 끌어내지 못하는, ‘레트로’라며 꾸며놓은 천편일률적인 벽화마을, 불량식품과 조잡한 물건을 늘어놓고 가난한 시절의 기억을 강요하는 ‘추억의 골목’들···.
사실 나는 이게 ‘다크 투어’의 일환인지, 더 인간적이고 덜 오염된 순수의 시대를 찾아가자는 시간여행인지 헷갈린다. 방문객들은 주민의 가난을 소재로 셔터를 눌러대다가 이제는 그것조차 싫증 난 듯하다. 지자체 관계자나 주민대표들은 여기저기 많이 다녀보면 좋겠다. 대단한 걸 배우거나 베껴오라는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균형감을 좀 보면 좋겠다.
수로를 따라 동쪽 끝까지 가면 네 곳에서 흐르는 물이 만나는 합수부(合水部)다. 두 물줄기가 만나 두물머리이니, 네 물이 만나면 네물머리인가? 잘 모르겠다. 현상이 없으면 언어도 빈약하기 마련이다. 국어사전에는 두물머리조차 안 나온다. 철제 다리를 건너면 또 다른 수상마을인데, 시장도 관광지도 아닌 남의 주거지에 들어서기는 좀 그렇다.
왔던 길로 되돌아서 북쪽을 향해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보았다. 마을을 남북으로 잇는 중요한 통로다. 다시 동서 방향으로 작은 수로를 만난다. 수로로서는 좁고 우리네 도랑보단 훨씬 크다. 개인들의 작은 보트가 정박해 있으니 어쩌면 제주 올레처럼 집 앞까지 들어오는 골목 개념일 수도 있겠다.
물가에서 멀어져 북쪽으로 마을을 벗어나자 저 멀리 철길이 보인다. 얼마나 오랜 역사를 가졌을까. 기찻길을 따라 걸어보려니 아내가 위험하니까 빨리 내려오라고 성화다. 양쪽 수 킬로미터 내에 기차는커녕 개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 뭐가 위험할까. 여행을 아무리 자주 다녀도 겁 많은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
후아타케역 매표소에서 엎드려 자는 역무원을 깨워 숙소 근처 역까지 가는 열차 시간을 물었더니 없다고 한다. 세 정거장 옆인데 왜 없지? 뭘 잘못 물어본 걸까? 언어의 벽을 느끼며 돌아섰다. 오늘 나들이는 여기까지, 의도한 대로 귀국 전 나들이를 잘 마쳤다. 여행 속에 또 하나의 여행을 한 기분이다.
대형 몰 로빈슨에서 귀국선물을 샀다. 약간의 액세서리, 헝겊 가방, 헤어 컨디셔너, 아이들 줄 과자 정도다. 세계 어디를 가도 예전만큼 살만한 것도 없고, 신기한 것도 없고, 나이 들수록 물건 욕심은 옅어진다.
면세점 쇼핑도 들뜬 여행 기분에 하는 거지, 세금 다 내고 시중에서 사는 게 더 싸다. 동남아에서 말린 과일 사 가던 시절은 지났고, 자잘한 선물은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독일 소시지, 태국 두리안처럼 욕심나는 건 대부분 반입 금지다.
아, 재스민 쌀을 2kg 샀다. 태국은 쌀의 주산지 아닌가! 가끔 안남미로 밥을 지으면 아주 고소하고 맛있는데, 한국에서 사면 맛이 덜하다. 두 봉지 집었다가 아내의 경고에 하나는 도로 내려놨다.
저녁 식사 후 가방을 싼다. 내일 이 시간엔 집에 있겠지. 오랫동안 집을 비웠더니 이런저런 걱정도 수면 아래로 내려가고 마음 편했는데 돌아갈 때가 되니 ‘아무 일 없었을까?’ 하며 약간 신경 쓰인다. 하쿠나마타타~~, 좋게 생각하자. 돌아가면 예쁜 내 새끼들도 볼 수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