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철 더봄] 순애보, 죽음을 불사하는 무조건 사랑

[한형철의 아리아 속 명작스토리] 지극한 사랑을 보여주는 드라마 <마에스트라> 미술과 아리아에서 만나는, 죽음을 초월한 순애보

2024-01-07     한형철 오페라 해설가

여성 지휘자를 소재로 한 드라마 <마에스트라>에서 유정재는 과거 연인인 차세음을 향해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주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녀를 지키려는 듯한 순애보 사랑에 시청자의 반응이 폭발하고 있지요. 

유럽인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들의 문화의 원천을 찾아서 동방을 꿈꿨으며, 또는 경제적인 필요에서 동방 세계를 탐험했습니다. 그 중심에 페르시아와 인도가 있었고, 인도양의 섬들은 그들에게 순수세계의 파라다이스 또는 환상적인 전설이 넘치는 신들의 천국이기도 했습니다. 

오페라 <카르멘>의 작곡자인 비제가 1863년 초연한 <진주조개잡이>는 이국적인 인도양의 실론 섬을 배경으로 신비로운 동양의 춤과 음악을 담은 오페라입니다. 한 여자와 운명으로 연결된 두 남자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고 있지요. 

바다 끝자락에 해가 지고 해넘이의 그림자가 백사장에 길게 드리운 평화로운 실론 섬의 마을이 배경입니다. 마을 뒤쪽에는 힌두탑을 품은 채 우뚝 솟은 바위가 바다를 향해 서 있고, 마을에서는 진주조개잡이 어부들이 춤추며 축제를 벌이고 있습니다. 추장 주르가는 나디르와 절친이지만, 예전에 한 여인을 두고 서로 다투기도 했지요. 연적이기도 했던 그에게 지나간 일은 잊고 다시 우정을 키우자며 함께 건배합니다. 

이때 진주조개잡이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해 줄 브라만교 사제 레일라가 베일을 쓰고 도착하고, 어부들은 꽃을 바치며 합창과 춤으로 그녀를 환영합니다. 추장 주르가는 그녀에게 정절을 지키고 성스러운 기도를 올릴 것을 서약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최상의 진주로 보답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요. 그녀가 서약을 어길 경우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경고도 덧붙입니다. 

  운명으로 다시 만난 레일라와 나디르 /사진=국립오페라단

서약 후 레일라는 신전에서 기도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때 레일라를 그리워하던 나디르는 목소리만으로도 그녀를 알아챕니다.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부르며 그 소리를 따라가지요. 예전에 베일 너머로 나디르를 흠모했던 레일라도 점차 가까워지는 그의 목소리를 느끼지요. 드디어 두 사람은 신전에서 해후합니다. 이렇게 운명처럼 만난 두 사람은 사랑을 맹세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지지요.

아뿔싸! 이때 제사장이 나타나 성소에 침입한 나디르를 체포합니다. 마침 폭풍우가 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일자,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불경한 짓을 저질러 하늘이 노했다고 격렬히 비난하며 그들을 죽이라고 소리 높입니다. 연민도 자비도 거부한 채 피를 부르는 합창이 점차 격렬해지지요. 

나디르는 다시 찾은 꿈 같은 사랑을 위해 죽어도 좋겠다고 하네요. 주르가는 사랑에 울고 우정에 뺨 맞은 상황입니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나를 배신한 친구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요. 추장인 그는 두 사람 모두를 처형할 작정입니다.

결국 주민들이 화형대를 준비하는 가운데 나디르와 레일라가 끌려 나옵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2중창 ‘아, 당신 곁에서를 부르며 서로의 곁에서 죽을 것을 다짐하며 사랑을 확인합니다. 

아, 당신 곁에서 행복하게 죽겠어요
두려움 없는 내 마음
그들의 분노에 맞서고
죽음 앞에서 웃는답니다
신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당신 품에서 죽음을 기다리겠어요

 


죽음을 불사한 순애보! 사랑을 지키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죽는 것은 타당성 여부를 불문하고 사랑의 극치임은 분명합니다. 다행이랄까··· 레일라가 주르가를 오래전에 구해주었던 사연이 처형 직전에 드러나, 주르가는 그들이 도망가도록 풀어줍니다. 

사실 요즘도 사랑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순정파의 사연이 가끔 보도되곤 합니다. 그런 일로 죽기까지 하느냐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우리네 가슴 한편에 아픈 핑크빛이 물들기도 하잖아요. 어차피 사랑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태어나면서부터 병약하여 장티푸스 등 온갖 죽을병을 달고 살다가 결국 결핵과 마약 중독으로 사망한 표현주의 화가 모딜리아니. 그 역시 몹시도 애절한 사랑의 주인공이랍니다. 생전에는 음식값 대신 자기 작품을 줄 정도로 가난했지만, 사후에는 인기가 폭발하여 그림값도 천정부지로 오르지요. ‘누워있는 나부’라는 작품은 2018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억5720만 달러에 낙찰됐을 정도니까요.  

  2018년 경매에서 최고가 낙찰된 ‘누워있는 나부’ (1917) 

주로 인물화를 그린 모딜리아니는 형태는 단순하게 그리고 대상을 기다랗게 표현했습니다. 이런 작품세계는 그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지요. 그에게 예술 영감을 채워준 뮤즈는 아내 잔 에뷔테른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즐겨 그렸습니다. 모자나 스카프 등으로 장식을 해가며 다양하게 그녀를 화폭에 담았지요.

모딜리아니가 35세의 이른 나이에 병사하자 잔은 미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합니다. 결국 화가가 죽은 다다음날 21살의 그녀는 그의 이름을 외치며 고층 건물에서 몸을 던져 순애보를 완성하지요. 그 당시 모딜리아니의 둘째를 임신 중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냅니다. 그들은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같이 잠들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