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정 더봄] 맛의 낙원 태국에서도, 당당하다 김치찌개여!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은퇴 부부 해외 한 달 살기-태국(5) 땀 쏙 빼는 한국식당 김치찌개에 감동 긴 여행엔 먹고 싶은 대로 잘 먹어야지

2024-01-06     박헌정 작가

“뭐 먹을까?” “당신 먹고 싶은 거.” “난 배 하나도 안 고파.” 선택권을 양보하는 척하며 서로 떠넘긴다. 이 정도면 둘 다 결정 장애다. 나가기 귀찮아 벌써 한 시간째 호텔 방에서 비비적거린다. 이러다 결국 건너편 식당에서 볶음밥이나 먹게 되겠지. 그 맛, 이제 좀 질린다. 김칫국에 계란찜이 그립구나!

이번 여행은 음식에 관한 대비가 허술했다. 출발 전부터 태국 음식에 대한 기대가 컸기에, 미리 준비한 한국 음식은 즉석밥, 컵라면, 볶음김치, 단무지 정도, 그리고 기내에서 챙겨온 고추장 두 개가 있다. 물론 많이 준비했어도 여기는 호텔이라 해 먹을 수 없다.

유럽 쪽에 갈 때는 음식에 신경 많이 쓴다. 김치, 소주, 밑반찬, 한식 양념, 심지어 앙증맞은 전기밥솥까지 준비하고, 숙소는 취사가 가능한 아파트나 주택을 얻는다. 밖에서 현지 음식을 먹거나, 장을 봐 한식 재료와 ‘콜라보’ 하거나, 가져간 재료로 한식을 해 먹으면 완벽한 조화다. 몸이 힘들 땐 숙소에서 누룽지나 북엇국 끓여 먹고 푹 쉬기만 해도 낫는 듯하다.

유럽에 갈 때는 한식 기본재료를 충분히 준비해서 현지 식재료로 다양하게 조리해 먹곤 한다. 크로아티아에서 만들어 먹었던 빙어튀김. 튀김가루까지 미리 준비해 갔다. /박헌정

그래도 시작은 즐거웠다. 도착하자마자 대형 몰에 가서 평소 그리워하던 태국 음식 Big4, 팟타이(볶음면), 카오팟쿵(새우볶음밥), 솜땀(파파야 샐러드), 팍붕화이뎅(공심채 볶음)으로 충전했다. 다음, 그다음에도 이걸 기본으로 꾸여이띠여우(국물 있는 쌀국수), 카우똠(쌀죽), 팟씨유(넓적한 볶음면), 카오카무(족발 덮밥), 푸팟퐁커리 등으로 넓혀가고, 모험적인 새 메뉴도 조금씩 더했다.

저렴한 현지 일상식인데도 달고 기름지고 짭짤하고 때로는 매운 고추로 입안이 싸해지는 태국 음식의 마성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풍성한 호텔 조식은 보너스다.

둘이 잘 먹고도 한 끼 만원 정도, 천국이 따로 없다. 은퇴 후 ‘왜 이리 밥때가 자주 찾아와 삼식(三食) 인생의 존엄성을 건드리나?’ 생각했는데, 이 해방감은 뭐지? 간간이 곁들이는 중식과 일식(feat. Chinese & Japanese), 등갈비 바비큐 같은 돼지고기 요리도 끝내줬다. “뭐 이리 비싸?” 하다 보면 삼계탕 한 그릇 값이다.

간식으로 먹는 망고 밥과 제철 파인애플은 어떻고. 오만해진 두리안의 빈자리가 전혀 아쉽지 않다. 콜라, 햄, 소시지, 과자를 엄격히 통제하던 아내는 하나둘씩 조건부로 허용하다가 이젠 다 포기했다. 이건 해방 맞다. 태국에선 살찔 수밖에 없다.

도착하자마자 평소 먹고 싶던 태국 음식을 원 없이 먹었다. 2000~3000원짜리 평범한 음식이지만 먹을 때마다 입이 즐거웠다. /박헌정

음식으로 행복한 건 여기까지다. 일주일쯤 되니 밥 먹으러 나가기 귀찮아진다. 객지 생활을 해보면 알겠지만, 먹기 위해 하루 세 번씩 움직이는 게 얼마나 성가신가. 이땐 ‘호텔 방 정식’이 필수다. 전기 포트에 물 끓여 세면대에서 햇반 데우고, 컵라면, 김치로 해결하거나, 태국 간편식, 빵, 음료, 과일 등을 틈틈이 비축한다.

이렇게만 해도 좀 편하다. 객실 취식을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이미 컵라면이 준비된 곳도 있고, 룸서비스도 해주니까. 그런데 더 심각한 위기가 온다. 태국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열흘 넘게 돌려막다 보면 질리는 게 당연하다.

그래도 우리 부부는 낯선 현지 음식에 적극적이고, 한국인의 최대 난관인 고수 향에도 적응했다. 하지만 몸이 허용하는 한계치는 분명히 있어, 결국은 한식을 먹어야 하고, 한번 먹으면 심신이 허물어져 계속 한식을 먹게 된다. 그래서 한식은 가능한 한 여행 후반부로 미룬다.

그런데 어제, 드디어 아껴둔 한식 카드를 한 장 꺼냈다. 시내에서 어슬렁대다 보니 날이 어둑해졌다. 호텔로 들어가면 다시 나오기 귀찮을 테고, 사 들고 갈 만한 것도 마땅찮고, 눈앞 태국 식당들은 좀 지겹고···. 게다가 방금 길에서 사 먹은 설탕 범벅 로띠 때문에 속이 니글거렸다.

오늘이 여행 14일째···, 그래, 이 정도면 많이 버텼다. 방콕에서도 치앙마이에서도 외면했던 한식을 이곳 소도시 치앙라이에서 먹기로 했다. 구글 평가 좋은 S 식당으로 향했다.

우리 부부는 현지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웬만한 음식에는 잘 적응한다. 치앙라이 나이트 바자에서 끓여 먹은 태국식 전골 요리 찜쭘(200밧=7500원) /박헌정

메뉴판에 익숙한 글씨와 사진이 펼쳐진다. 해외 한국식당의 메뉴판은 대부분 짜임새 없이 산만하다. 삼겹살, 김치찌개, 비빔밥, 낙지볶음 같은 주요 메뉴 사이에 뜬금없이 떡볶이, 냉면, 물회가 끼어있는 식이다. 처음에는 어이없어 웃거나 실력을 의심했는데, 이제 좀 알겠다. 재료 조달이 힘들고 수요층도 뻔한데 한쪽만 깊이 파고들기 힘들 것이다.

해외에서 가장 당기는 것은 역시 칼칼한 김치찌개, 고민 없이 선택했다. 이런 곳에서 종종 다른 걸 시켜 나눠 먹자고 해서 나를 귀찮게 하는 아내도 김치찌개를 고른 걸 보면 나와 뱃속 사정이 비슷한가 보다. 1인분에 150밧(5600원), 이 정도면 <김밥천국>의 10년 전 가격 아닐까? 게다가 한국 음식은 물과 반찬 포함이다.

역시 한국인은 상에 반찬이 깔려야 제대로 밥 먹는 것 같다. 덮밥이나 국수 종류처럼 한 그릇 달랑 내주는 음식도 맛과 양은 충분하겠지만, 그것만 떠먹다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급해지고 목메는 느낌이 든다.

우리에겐 숟가락으로 밥 떠먹고 젓가락으로 반찬 집어 먹는 그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하지 않은가. 싱겁지 않은 만두를 간장 찍어 먹고, 양파 가득한 짬뽕을 먹으면서 생양파를 춘장 찍어 먹는 것도 맛보다 리듬 때문이다. 한국인이 밥을 급하게 먹어도 잘 소화하는 건 그 리듬 덕분이 아닐까. 물론 내 생각이다.

식탁보 외에는 전부 한국적인 조합이다. 우리 식대로 차린 밥과 찌개와 반찬을 마주하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박헌정

김치찌개는 알싸하고 얼큰한 게, 아주 제대로 맛이 났다. 돼지비계를 쑹덩쑹덩 제대로 썰어 넣고, 적당히 잘 익은 김치로 끓였다. 국물을 몇 번 떠먹으니 비로소 혀와 식도와 위장관이 싸해지며 기분이 차분하게 진정된다. 이게 ‘쏘울 푸드’다. 눈물 젖은 빵이라고? 눈물 대신 콧물 한 방울이 찌개 속으로 똑 떨어진다.​

세계인을 사로잡은 태국 음식 사이에서 느껴보는, 한국인의 기상이 느껴지는 꿋꿋하고 강직한 이 맛! ‘한국인은 역시 밥심’이라는데, 쌀과 밥의 나라 태국에 있다 보니 그 말을 좀 바꿔야겠다. 한국인은 밥심보다 김치 힘으로 움직인다.

김치찌개 맛을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서울의 어느 뒷골목 식당에서 끓인 것과 똑같은 맛이었다. /박헌정 

전에 해외에서 한식 먹는 내용을 썼더니 누군가 댓글에 “현지 음식을 즐기는 게 진정한 여행”이라며 나를 덜떨어진 여행자로 내몰았다. 누군들 그걸 모를까? 해외에서 일 년간 마른 빵만 먹고 산 적 있다.

한식이든 뭐든 참으려면 얼마든지 참는다. 먹는 것에 대한 느낌과 기억과 관심을 제거하고, 식사 때가 되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주방으로 달려가 냉장고의 식량을 흡입하면 된다. 차에 주유하는 것 같은 건조한 삶이다.

인제 와서 왜 그래야 하지? 수출선 개척하려고 굶고 뛰어다니는 해외 출장인가? 우리 세대의 여행은 고행일 필요 없다. 단기 여행이면 현지식을 한 번 더 먹는 게 남는 일이겠지만 긴 여행에선 최대한 편하게 잘 먹어야 한다. 몸이 먼저다.

중요한 게 또 있다. 해외에서 한 달 살기는 무대만 바꿔서 이곳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므로 거주 여건 또한 호텔 아닌 살림집이 좋고, 늘 외식만 할 게 아니라 밥도 제대로 해 먹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번 한 달 살기는 좀 어그러졌다. 다음에는 호텔에만 묵을 게 아니라 취사가 가능한 숙소를 구해야겠다.

낯선 곳에서 제대로 한 달 살아보려면 호텔보다는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숙소를 빌리는 게 좋겠다. 장소만 바꿔 이곳의 일상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다. /박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