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옥 더봄] 영원한 겨울 간식 고구마의 소박한 변신 - 고룽지를 아시나요?

[홍미옥의 일상다반사] 겨울이면 찾아오는 뜨끈한 군고구마가 이번엔 '고룽지'란 요상한 이름으로 왔다

2023-12-18     홍미옥 모바일 그림작가
최근 SNS상에서 인기 먹거리로 떠오른 고구마 누룽지인 고룽지 /그림=홍미옥, 갤럭시탭S6

''전쟁통에 어른들 볼은 야위어가고 아이들 배는 개구리처럼 튀어나온다.''

박완서 작가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에 나오는 구절이다. 함께 등장하는 '고구마'는 가난을 구제해 주는 고마운 먹거리이기도 하고 주인공인 일곱 살 소녀가 다섯 살 동생의 손을 놓아버리는 아픈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분명 볼품없이 작은 고구마였겠지만 전쟁통의 주식이 되었을 그것을 나눠 먹기 싫은 어린 소녀의 마음이 아프게 다가왔던 이야기였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가난이라는 단어에 아프게 자리를 차지하던 고구마는 이제는 다이어트와 건강이라는 키워드로 관심을 받고 있다.

알려져 있듯이 고구마는 18세기 후반 부산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진다. 조금만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도 않을뿐더러, 가뭄이나 재해에도 강하며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다는 게 당시의 평가였다. 지금 봐도 하나도 어색할 것 없는 고구마의 맛 평점인 셈이다.

내가 아는 고구마는 그저 군고구마 혹은 찐 고구마다. 간혹 날것을 깎아 먹기도 하지만 여간해서 단맛의 생고구마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 요즘 탕후루의 인기에 힘입어 원조 탕후루라 할 수 있는 고구마 맛탕이 있긴 하지만, 내겐 너무 달다. 자칫 찐득한 그걸 잘못 물었다간 치아에 충격(?)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겠다.

고룽지가 뭘까?

요즘 젊은 세대는 질문도 자랑도 때론 과시까지 영상이나 사진으로 털어놓는 세상이다 보니 점점 이해가 느려지는 우리 세대들에겐 오히려 반가울 뿐이다. 언제부턴가 약과의 열풍에 이어 그 이름도 생소한 고룽지라는 콘텐츠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고구마 누룽지를 일컫는 말이다. 잠깐의 시간도 아까운 듯 고작 여섯 글자를 반으로 싹둑 잘라 이름 짓는 그마저도 귀엽게 느껴진다.

어느새 SNS에서 핫하다는 간식 랭킹에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름에서 풍기듯 고구마를 누룽지처럼 만들어 먹는 것이다. 그냥 쪄먹어도 달콤한데 뭉근한 불맛과 시간까지 곁들이니 맛이 없을 수가 없겠다.

그렇다면 나도 한번 만들어봐야겠다. 평소 요리라곤 관심도 솜씨도 없는지라 무얼 보고 실행에 옮기는 일은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이건 쉬울 것도 같았다. 아닌 게 아니라 즐겨 찾는 커뮤니티 게시판엔 '뚝딱 고룽지 만드는 비법'이랄지 '눈감고도 만드는 3분 고룽지' 등 재기발랄한 주옥같은 게시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동안 나만 모르고 있었나보다 고룽지 열풍을···. 후후후.

만들기는 예상처럼 쉬웠다. 적당히 삶거나 그마저 귀찮으면 전자레인지에 익힌 고구마를 프라이팬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접시나 밥그릇으로 짓이기듯 눌러버린다. 이 과정은 은근히 통쾌하기도 해서 기분이 언짢은 날에 하면 더 좋을듯싶었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고구마를 약불에서 천천히 아기 다루듯 눌려주면 완성이다.

단! 자칫 부서지기 쉬우므로 참을성 있게 눌러주든지 아니면 에어프라이어에 굽는 것도 방법이다. 집에서 먹고 남은 견과류가 있다면 꿀을 바르고 뿌려주면 금상첨화다. 물론 그냥 먹어도 본래의 달콤함에 최강의 고소함까지 장착한 수제 간식이 탄생한다. 별거 아닌데 참 맛있다.

유치원 가방에서 고구마가 데구루루

겨울 간식으로 여전히 사랑받는 군고구마 /그림=홍미옥, 갤럭시노트20

이십여 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다섯 살이던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고구마 캐기 체험학습을 떠났던 날이다. 여느 때보다 아이의 귀가는 늦어질 테고 이때다 싶어 신나게 쇼핑도 하고 친구도 만나는 등 자유를 즐기기에 바빴다.

아차차! 생각 없이 놀다 보니 아이의 귀가 시간이 살짝 지나 있었다. 부지런히 달려왔으나 이미 아이는 햇빛에 익은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문 앞에 서 있는 거 아닌가. 등에는 볼록한 배낭을 메고서.

평소 같으면 울고불고 우리 엄마 어디 갔느냐며 떼를 썼을 게 뻔한 아이는 잔뜩 신이 나서 가방을 열어 보인다. 데구루루~~ 고구마가 굴러 나온다. 흙이 묻은 채 줄기도 뒤엉키고 아기 주먹만 한 혹은 어른 손가락만 한 고구마가 작은 가방에 그득했다.

엄마 주려고 친구들보다 많이 캤다며 아이는 자랑스러워 어쩔 줄 몰라 했다. 온통 땀으로 젖은 다섯 살 아이는 세상을 거머쥔 듯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더운 날이었지만 뜨거운 찐 고구마를 호호 불며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별거 아닌 에피소드가 요즘 인기라는 꿀 바른 고룽지보다 더 달콤하고 고소한 추억이 되었다.

모양은 우스꽝스럽지만 제법 맛있는 고룽지를 먹다 보니 아이와의 추억이 생각나 자꾸만 웃고 있다. 누구에게나 냄새로 혹은 맛으로 세월을 반추하는 먹거리가 있겠지만 나의 오늘은 고구마였다. 이웃 나라 일본은 고구마 맛 지도까지 만들어내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한 개에 무려 만원이라는 고가의 상품도 있다고 한다.

아! 마침 겨울이어서일까? 한껏 맛있다며 칭찬을 마지않던 고룽지를 먹으면서도 한겨울 드럼통에서 장작불에 익어가는 군고구마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