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북정마을 산책

[박재희의 브라보 마이 라이프] 추억으로 남은 과거의 한 장면을 찾아 서울에서 가장 먼저 달이 뜨는 언덕 성북동의 오래된 미래, 마을 공동체

2023-11-23     박재희 작가

저녁이 내려온 마을. 컴컴한 골목은 좁고 가파르다. 흑백 TV 앞에 모여 앉아 ‘박치기왕’ 김일의 레슬링 경기 방송이 시작할 때를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당시 아빠들은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100원짜리 하나를 손에 꽉 차게 쥔 아이는 허둥지둥 어두운 골목을 뛴다. 넘어져서 돈을 흘리고 잃어버린 아이는 빈손으로 돌아와 꿀밤을 맞았다.

깨진 무릎에 ‘아까징끼’(빨간약·소독약)를 발라주고 우는 아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은 쌀집 어른, 큰마당 집 아줌마였다. 깨진 팔꿈치와 무릎이 아파서, 꿀밤을 맞은 것이 서러워서 울기도 했지만 김일 아저씨의 박치기 장면을 놓친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아이는 더 크게 울었다.

50년 전처럼 귀갓길의 아버지 손에는 아이들이 먹을 간식거리가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1970년대는 그런 시절이었다. 까마득한 하늘을 가리는 스카이라운지가 나타나기 전이고 ‘리버뷰아파트’, ‘◯◯힐타운’ 대신 강이 보이는 언덕에 게딱지 같은 집을 짓고 살았던 때였다. 어깨높이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닥다닥 붙어살던 시절, 부대끼며 성가셔도 정겨운 이웃이 있던 그때를 추억하는 어른과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젊은이가 타임머신을 타고 성북동에 도착했다.

여기서 시간은 우리가 까맣게 잊고 있던 시절을 향해 빠르게 되돌아간다. 햇볕이 좋은 담벼락에 기대앉아 채소 손질을 하는 어르신들이 있었고, 계절 맞이 장기를 두는 할아버지들이 훈수를 두다가 다투고, 막걸리 한잔으로 화해하는 일상을 아도 목격할 수 있는 마을이 서울에 남아있다.

서울에서 가장 먼저 달이 뜨는 언덕, 서울에 남은 마지막 달동네, 성북동의 북정마을이다. 1972년 시인 김광섭은 성북동의 ‘부촌’이라 부르는 고급 주택 개발로 쫓겨난 원주민을 비둘기로 노래했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원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그때 번지를 잃은 비둘기들이 터 잡은 마을이라고 오랫동안 ‘비둘기 마을’로 불렸다.

한양도성 성곽이 자리하고 있는 북정마을에는 민족사상가 만해 한용운이 말년을 보낸 집이 있다. 선생이 예순여섯 나이로 입적할 때까지 살았던 집, 심우장은 북정마을로 올라가는 길에 가장 먼저 보이는 한옥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추상같은 절개로 저항의 삶을 산 만해가 1933년 성북동 산자락에 지은 집이다.

“여름에 덥고 빛이 덜 들더라도 총독부와 마주할 수는 없다.”

만해는 남향으로 터를 잡지 않고 조선총독부를 등지는 북향집을 지었다. 심우장은 정면 4칸 측변 2칸으로 단출하다. 대문 왼쪽에는 소나무, 오른쪽에는 은행나무가 지키고 있고 마당에는 선생이 생전 직접 심었다는 향나무 한 그루가 높이 자랐다. 서재로 쓰던 왼쪽 방 앞에는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이 쓴 편액이 걸려있다.

심우장(尋牛莊)은 불교에서 말하는 ‘사람의 본성인 소를 찾는 집’이라는 뜻이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서 배급도 받지 못했던 만해는 늦게 얻은 가족 부양을 위해서라도 심우장에서 왕성한 집필활동을 했다. 선생은 이 집에서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었으나 ‘조선 땅 전체가 감옥’이라며 생전 아궁이에 불은 때지 않았다고 한다.

해방을 한 해 앞두고 입적한 만해의 심우장 툇마루에 앉아본다. 집은 거하는 사람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던가. 버릴 것을 모두 버린 만해의 추상같은 불호령, 기상이 오연하다.

만해 한용운의 생가 심우장. 성북동 북정마을 초입에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심우장 뒤로 언덕을 향하는 길은 더 좁아지고 가파른 계단이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나는 골목길이 마을 꼭대기에 닿기 전, 왼편으로 작은 공원이 나타났다. 공원이라고 부르기에 민망할 정도로 아담한 공터가 ‘비둘기 공원’이다. 비둘기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공원 벽에는 교과서에서 읽었던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가 쓰여 있다.

제대로 작동될 것 같지 않은 변변찮은 운동기구와 누가 가져다 놓은 건지 버린 건지 알 수 없는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잘 가꾼 화단이나 흔한 음료 자판기 하나 없지만 공원은 초라하지 않다. 서울 최고의 부자들이 사는 동네를 발아래 놓아두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어깨를 기대 사는 마을의 공원에서 시간은 느긋해진다. 

아직 전깃줄을 묶어 빨래를 널고, 낮은 지붕 위 돌멩이와 함께 잡초가 자라도록 두는 사람들의 마을. 공원을 두리번거리는 외지인을 구경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고양이와 함께 잠시 앉아 쉬기에도 좋다.

코로나 정국으로 한산해졌다 해도 버스 정류장 앞 길거리 카페에서 약속 없이 모인 사람들이 장기를 두는 모습은 각자 스마트폰만 쳐다보던 외지인에게 낯설고 설레는 풍경이었다. 재개발을 앞두고 폐쇄된 북정카페에 걸린 옛 사진을 돌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쉬다가 초롱이라는 이름의 개가 새끼를 밴 것 같다든가 하는 마을 소식을 들을 수 있던 곳이다.

주말이면 심심찮게 산꼭대기 마을로 오는 버스가 카메라 든 사람들을 내려놓는다. 골고루 짊어졌던 결핍의 시대를 추억으로 소비하려는 사람들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그랬다. 모두가 공평하게 어렵고 가난하던 시절의 풍경을 찾아 수집하는 마음으로 마지막으로 남았다는 달동네를 찾아왔다.

하지만 이곳에서 만난 것은 결핍의 흔적이 아니라 오래 잊고 있던 사람 냄새다. 발꿈치를 올려 들여다보면 마당에서 학원에 가지 않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한다. 대문을 활짝 열어 골목으로 마당을 넓히고 자리를 편 어르신은 나물거리를 널어 말린다. 모퉁이를 돌면 구슬치기를 하던 사내아이들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한양 도성 성곽을 따라 바깥쪽 산기슭에 북정마을이 자리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구경삼아 나섰던 발걸음이 슬그머니 부끄럽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그들의 삶을 흑백사진 속에 가두려 한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누군가에게 치열한 오늘이 구경꾼에게 고작 옛 시절의 상징이 되어서야.

현재 진행형으로 삶을 추억 혹은 향수라는 틀에 가두고 음미하려던 마음은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겨누었던 총부리를 거두듯 카메라 렌즈를 닫고 마당에서 노는 아이들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북정마을에 개발 논리가 휘몰아치고 여타 마을처럼 개발 추진 세력이 들어와 ‘보존개발’과 ‘철거재개발’ 현수막을 걸어두고 시끄러울 때도 대다수 사람은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 마을은 살기 좋고 불편하지 않은데 굳이 재개발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 사람이 걷기도 좁은 골목길, 오렌지색 전등이 들어오는 동네를 카메라 대신 마음에 담으며 천천히 새로운 옛것, 오래된 미래를 걸어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