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더봄] 당신의 취미는?

[김정희의 좌충우돌 연기도전기] 연기가 좋아 시작한 취미활동 노련한 연출 선생님의 지도로 연습장엔 늘 웃음소리가 가득

2023-12-01     김정희 그리움한스푼 작가

연극을 시작하기 전 나의 취미는 탁구였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누군가를 향해 마구 욕을 퍼붓고 싶을 때 지체없이 탁구장으로 향했다. 탁구하다 보면 힘든 일도 그 누구를 향한 미움도 하얗게 부서졌다. 하얀 공이 초록색 무대 위에서 건너편 모서리를 정확하게 찍고 튕겨 나갈 때, 상대방이 붕 띄운 공을 스매싱할 때, 나는 짜릿한 전율로 십 년은 젊어지는 것 같았다.

탁구는 너무 재미있어 2시간이 휙 지나간다. 단식보다 복식이 재미있는 광경이 자주 연출된다. 복지관에서 어르신들과 같이 치는 탁구는 늘 웃음이 가득하다. /픽사베이

 

내가 재빠르게 넘긴 공을 상대방이 어쩔 줄 몰라 헛손질할 때의 짧은 환호와 더불어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땀의 감촉은 기쁨과 동일어였다.

그러나, 늘 환호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또한 상대방이 빛의 속도로 강하게 받아치는 공을 "어" 소리 지르며 어이없이 점수를 내줄 때도 많았다. 이기고 지는 일은 늘 있는 일이라 이기고 지는 것에 크게 맘 쓰지 않은 척하지만 이기면 기분이 좋고 지면 찌푸린 이마에 살짝 잔주름이 생겼다 사라진다. 

3년 전 A 동네로 이사 온 후, 집 가까이에 있는 복지관 탁구장에서 어르신들과 탁구를 한다. 상대방이 친 공이 붕 떠서 날아오면 “때리세요, 때려”, 커트로 들어오는 공은 “깎으세요”를 외치며 북 치고 장구 치면서 쇼를 한다.

탁구는 내가 쳐도 재미있고 다른 사람들이 치는 것을 봐도 재미있다. 게임을 구경하는 내 표정을 누군가가 보면 아주 재미있을 것이다. B팀의 어느 선수가 아주 빠르게 공을 보내면 순간 내 눈동자가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상대방이 그 공을 놓치면 안타까움으로 몸이 앞으로 기운다. 서브를 넣는 사람이 입을 돌리면 자연히 내 입도 비틀어진다.

온 힘을 다해 라켓을 휘둘렀는데 공이 맞지 않고 머리 위를 지나 바닥에 닿으면 나도 모르게 "어휴~"하는 한숨이 터진다. 어려운 공을 잘 받아 치면  "화이팅" 소리치며 즐거워한다. 2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나는 웃고 즐기는 탁구에 빠져서 무릎이 아파도 허리가 아파도 라켓을 들고 탁구장으로 향한다.

환갑을 코 앞에 두고 맛을 본 연기도 매력 만점이었다. 먹고 또 먹어도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 같고 보고 또 봐도 헤어질 때는 아쉬움으로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연인 같았다. 처음 만난 연출 선생님은 험한 세상에서 용케 버티었네 할 정도로 아주 느긋했다. 너무 열심히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입 벌어지게 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연기 인생 2막은 아주 훌륭한 또 다른 연출자를 만나는 장으로 이어졌다. 호흡 훈련과 발성 연습 뒤에 이어지는 리딩은 각자 다른 목소리, 사투리의 억양,  띄어읽기의 어색함으로 우리를 웃게 했다. 수정을 해 주어도 여전히 똑같은 억양으로 말할 때, 웃지 말아야 함에도 누군가 겨드랑이를 살살 간지럽힐 때 참을 수 없는 웃음처럼 킥킥거렸다.

나의 경상도 사투리도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애써 의식하지 않으면 오랫동안 몸에 스며든 습관을 고칠 수 없는 것처럼. 문장의 처음을 강하게 읽는 경상도 특유의 억양과 “으”와 “어”의 구별 없이 퉁 치는 발음이 사람들을 웃게도 하고 의아하게 만들기도 했다. 지금도 “은행”을 “언행”으러 발음하면서 “언행 가서 돈 찾아올께”라고 하니 어찌 아니 웃을쏜가?

띄어읽기도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다. “더구나 자식까지 딸렸으니···"라는 대사를 '더구나'에서 띄지 않고 '더구나자식까지' 읽은 후 띄면  자식 이름이 더구나가 되는 우(愚)를 범한다. 연출 선생님의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지 3초 늦게 알아차리고 누군가가 웃으면 그게 재미있어 또 웃는다.  감정이입도 똑같은 대사를 누가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니 웃음이 도미노처럼 연속으로 터진다.

가끔 연출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는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어느 날, 조용한 가운데 막이 오르고 첫 대사를 읊었는데 관객석에서 아주 얌전하게  “뽕”하고 방귀를 터트리자 모두들 고개 숙여 참고 있었다고 한다. 겨우 한 토막 끝내고 암전이 되었는데 어둠 속에서 “나, 아니야”라는 소리 때문에 결국 한바탕 웃고 10분 휴식 뒤에 다시 연극을 시작한 경우도 있다고 하셨다.

연극, 영화, 드라마를 섭렵한 연출 선생님은 여유 있게 수업을 진행하며 우리를 쥐락펴락했다. 사람의 심리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난 원00 연출 선생님의 연극 아카데미가 개강하면 빠짐없이 듣는다. 웃으면서 즐기는 취미 생활이 삶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각설하고

 나는 선배의 요청에 새로운 연출 선생님과 낯선 배우들을 만나 또 한 편의 연극을 공연하게 되는 행운을 얻었다. 연습 장면을 찍어서 어색한 부분을 수정하고 이런저런 다양한 목소리로 다시 한번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본다. 무대 위로 조명이 들어오고 그 조명이 내 모습을 비출 때 "안녕하세요?"라며 17살의 여고생 목소리로 발랄하게 인사를 한다. 이미 짜인 극본에 연출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수없이 연습한 모습을 무대라는 공간을 통해 펼쳐 보인다.

늘 설레고 즐거운 무대,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돌아가면 허전함이 자리 잡은 반복의 과정을 거치지만 난 연기가 좋다. 때론 다섯 줄 대사로 끝난 가정주부로, 말할 줄 아는 새(鳥)로, 부잣집 안방마님으로, 17살의 여고생으로 다양한 인생을 산다. 길 가다 연극 포스터를 보면 자연스럽게 눈이 가고, 대학로 소극장 앞을 지나치면 어떤 연극이 공연되는지 살펴본다.

누가 멋진 연극을 소개하면 배우의 표정까지 볼 수 있는 앞자리에 앉아서 배우의 움직임, 대사의 톤을 살펴본다. 대사를 반복하는 배우의 실수도, 물구나무 서다가 쓰러지는 실수도, 격한 춤을 추다 분홍색 가발이 벗겨지는 실수도 보게 된다. 며칠 전에 똑같은 연극을 2번 보았다. 같은 극본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다른 연극. 누가 연기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아주 달랐다. 친구에게 소개하고픈 연극이었다.

내 연극을 보고 누군가에게 소개하고 싶어 하는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 나 스스로 만족하는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 내가 만족해야 보는 사람도 그 연극에 빠져들지 않을까? 그래야 연극이 끝나고 커튼콜 불이 들어올 때 웃으면서 인사할 것 같다.  고개숙인 나의 얼굴에서 반짝반짝 웃음이 빛날 수 있기를.

유독 젊은 친구들이 많았으며 주말마다 모여서 연습하고 뒤풀이도 주말에 했던 낭독극의 무대인사 /사진=김정희

무대에서 퇴장할 때  홀가분한 기분으로 퇴장하길. 그리고 또 다른 무대에서 기쁜 마음으로 무대에 서길 희망하며 '인생2막 좌충우돌 연기도전기'의 막을 내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