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치매 병명, 의학계 반대로 행정용어만 개정 추진
치매안심센터·치매관리법 등 행정 용어 개정 의학계 "질환 범위 넓어 통일하기 어려워" 요양업계 "병명 개정 의료계가 주도 아집"
'어리석다'는 뜻의 한자어인 치매(癡呆) 병명 개정이 의료계 반발로 난항을 겪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환자의 인격을 폄하하는 뜻을 담은 치매 병명을 중립적인 '인지병' 혹은 '인지저하증'으로 개정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그러나 의료계가 "치매의 병 특성상 질환의 범위가 넓어 병명 개정을 섣불리 할 수 없다"고 반대해 먼저 행정용어만 개정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여성경제신문 취재 결과 확인됐다. 의학용어로는 치매를 그대로 쓰되 '치매안심센터'나 '치매안전관리법' 등 행정용어에선 치매를 대체하는 다른 용어를 쓰도록 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환자 가족단체나 요양시설 업계에선 의료계에서 '치매'란 용어를 진단명으로 계속 쓴다면 일상생활에서도 용어를 바꾸기 어려울 것이라며 결국 보여주기식 행정으로 전락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25일 여성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치매 병명 개정과 관련 의학계와 정부 간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용어개정협의체의 한 고위급 관계자는 여성경제신문에 "현재 사용 중인 '치매관리법', '치매안심센터' 등의 행정용어에 사용되는 병명을 개정하는 건 무리가 없다"면서도 "다만 치매라는 질병 특성상 전두엽 치매, 알코올성 치매, 혈관성 치매 등 그 범위가 방대하다 보니 일률적으로 인지병 혹은 인지저하증으로 단정 지을 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의학용어는 각 병을 직접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요양시설 단체 관계자는 "모든 치매 병명을 인지병 하나로 통일하지 말고 치매란 단어만 인지병으로 바꾸면 전두엽 인지병, 알콜성 인지병, 혈관성 인지병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데도 의료계가 이를 반대하는 건 병명 개정 논의를 의료계가 주도하지 않으면 찬성할 수 없다는 전문가집단의 아집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치매 병명 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건 지난 1월. 본지가 지난해 12월 23일 보도한 '[단독] '바보'란 뜻 치매 병명 바꾼다···내년 1월 복지부 TF팀 구성'에 따르면 복지부는 당시 치매 병명 개정 논의를 본격화하기 위해 관련 단체·기관과 테스크포스(TF)를 구성하기로 했다.
치매 병명 개정을 위한 복지부 차원의 TF팀인 '치매용어개정협의체'에는 대한치매학회와 대한노인정신의학회 등 관련 기관 및 단체가 참여했다. 이후 참여 기관과 함께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개정 용어를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여성경제신문이 지난 2021년 12월 27일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과 국회에서 공동 주최한 '치매병명개정토론회'에서도 병명 개정과 관련 의학계와 기타 관계자들 간 이견이 발생하기도 했다.
여성경제신문이 지난 2021년 12월 27일 이종성 국민의힘 의원과 국회에서 공동 주최한 '치매병명개정토론회'. /여성경제신문 유튜브 채널
당시 토론자로 참여한 최호진 치매학회 정책이사는 "의학용어인 만큼 의료현장에서 혼란이 없는 용어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상황을 보면 이 부분이 가장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정신분열증을 조현병으로, 간질을 뇌전증으로 개정할 때는 의료계가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치매 병명 개정에 대해선 의료계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있다"며 "치매 병명 개정을 위해선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더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명 개정에 찬성 입장을 고수한 한국노인복지중앙회 소속 임재경 전 총장은 이와 관련 "치매라는 단어의 부정적 의미 때문에 돌봄 현장에선 치매란 용어를 쓰지 않는다"며 "매번 다른 용어로 쓰려다 보니 불편한 만큼 치매 환자를 비하하지 않는 중립적 대체 용어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그는 "정신분열증도 조현병으로 개정하고 나서 환자와 가족 모두 거부감이 줄어든 걸 현장에선 피부로 느낀다"며 "이름이 주는 낙인효과를 간과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의학계 입장에 반박했다.
의학계에선 병명 변경이 사회에 미칠 파급 효과에 대한 고려도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양동원 대한치매학회 이사장은 지난 4월 진행된 춘계학술대회 기자간담회에서 "명칭을 변경하면 (치매 인식 개선이라는 목적에 따라) 치매안심센터 같은 기관도 '인지증진센터'처럼 긍정적인 인식을 심어주는 방향으로 변경되고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를 비롯해 국민에게 실질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는 미지수다. 치매 환자와 가족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고 국민이 그 필요성을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익명을 요구한 신경과 전문의는 본지에 "병명 변경 이후 치러야 할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고려가 부족해 아쉽다. 외국처럼 학회와 민간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준비하는 과정이 필요했다고 본다"면서 "이미 (논의할 수준을) 지나간 만큼 가급적 혼란과 피해를 줄이는 방향으로 최선의 결말이 나길 기대한다"고 했다.
현재까지 치매용어개정협의체에서 논의된 대체 병명 후보군은 '인지병'과 '인지저하증'으로 좁혀졌다. 협의체 한 관계자는 본지에 "대체어로 적합한 병명은 인지병과 인지저하증"이라며 "인지병은 '감염병'처럼 관련 질환을 포괄하는 행정 용어 성격이 강하다. 인지저하증은 2021년 복지부가 진행한 대국민 인식조사에서 후보 중 가장 높은 국민 지지(31.3%)를 받았다. 다만 아직 확정된 바는 아니다. 다른 대안이 있는지도 시간을 두고 고려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의학계에선 대체어로 '신경인지병'과 '신경인지장애'를 제안했다. 지난 2013년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이 치매(Dementia)를 신경인지장애(Neurocognitive Disorders)로 변경한 것을 따랐다.
복지부 관계자는 "최근 병명이 바뀐 사례를 보면 조현병과 뇌전증이 있다"면서 "이 경우 의학계가 명칭 변경을 주도하고 몇 년간 의견 수렴을 거쳤지만 치매는 정부가 추진하면서 이런 절차가 생략됐다"고 말했다. 이어 "병명은 국민이 사용하는 단어인 만큼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협의체 내부에선 병명 개정에 대한 관심이 국정감사와 총선 이슈로 인해 소강상태에 접어든 것으로 알려졌다. 협의체 관계자는 "10월 국정감사와 내년 총선 등 이슈로 인해 관심도가 줄어든 것이 사실"이라면서 "다만 정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인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