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영 더봄] 우리나라 진정한 댄스 1세대는?···그리고 그 후
[강신영 쉘위댄스] (36) 우리나라 댄스의 지나온 길 80년대 중앙·동아문화센터 통해 양지로 그 전에 가르쳤던 분들이 진정한 1세대 코로나19 직격탄 맞았지만 숨통이 트여
내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고령자 축에 든다. 노인을 법적으로 65세 이상으로 뭉뚱그리니 70이 넘으면 당연히 노인이다. 다른 세대는 10대, 20대 식으로 10년 단위로 구분 짓는데 노인은 65세 이상은 한 무리로 친다. 그리고 전쟁 이후에 움트기 시작한 무슨 분야든 1세대에 속한다.
그러다 보니 나도 댄스 1세대로 친다는 사람이 있다. 나이로 봐서는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이야기다. 댄스 1세대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앞에 몇몇 선배분들도 생존해 있다.
그러나 진정한 댄스 1세대는 댄스가 양지로 나오기 전에도 댄스를 가르쳤던 분들이다. 80년대 중앙문화센터와 동아문화센터가 생기면서 댄스스포츠가 양지로 나왔다. 나는 그때 댄스계에 합류한 사람이므로 진정한 댄스 1세대의 자격은 없는 편이다. 당국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생업을 위해 또는 댄스라는 문화에 대한 열정으로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사람들이 진정한 1세대다.
이미 그분들의 자녀 세대들이 댄스계에서 자리를 굳힌 경우가 많아 그들을 2세대라고 분류하다 보니 그들의 부모 세대인 나도 1세대로 분류되는 모양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 댄스계는 해방 이후부터 지르박 블루스 위주의 사교댄스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80년대 라틴댄스와 모던댄스를 추는 스포츠댄스의 등장은 신선한 바람이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시범 종목이 되면서 ‘스포츠댄스’가 ‘댄스스포츠’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0년대만 해도 댄스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색안경을 끼고 보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지만,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들이 이때 참여한 것이다.
그런 용감한 사람들이 댄스스포츠를 직접 접해 보니 그전에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르게 건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댄스에 대한 이미지를 좋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운동 효과도 좋고 취미생활로도 훌륭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붐을 타고 각 백화점 문화센터에 댄스스포츠반이 신설되면서 체육센터, 구민회관, 주민센터까지도 확산하였다. 대학교에서도 정식 학과가 생기고 전국체육대회에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여러 계열의 전국 규모 댄스 대회도 성황을 이뤘다. 동아시안게임에도 정식종목이 되었다.
그 시기에 댄스동호회도 우후죽순 격으로 생기면서 그야말로 댄스스포츠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의사 댄스동호회처럼 사회 지도층인 사람들의 댄스동호회도 생겼고 중견 간부급 부부만이 입회 자격이 있는 동호회도 생겼다.
댄스스포츠의 저변 인구가 늘어나자 댄스화, 댄스 의상, 댄스 화장, 댄스 음악 등을 취급하는 업종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댄스 전문잡지도 월간으로 나올 때였다. 우리도 영국, 이탈리아 등 댄스 선진국으로 유학을 나가기 시작했고 세계 톱 랭커 선수들이 내방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았다. 댄스스포츠는 커플 댄스이다 보니 밀폐, 밀집, 밀착이 모두 해당되는 종목이다. 그렇게 지난 3년간 댄스 지도자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학생은 안 들어오고 임대료는 내야 하니 살아남은 것이 다행일 정도였다. 군사 정권 시절 질곡의 시대를 몸으로 버텨내고 두 번째 암흑의 시대를 맞았다. 그럼에도 버텨온 그분들 덕분에 댄스스포츠가 살아남아 다시 숨통이 트인 셈이다. 존경과 감사를 표해야 할 판이다.
1세대의 역할은 훌륭했다. 질곡의 시대를 겪으며 드디어 댄스를 양지로 나오게 한 공로다. 그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2세대들에게는 세계 무대로 발을 넓히면서 댄스스포츠의 위상을 굳건히 그리고 업그레이드시켰다. 댄스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장수하는 편이라 1세대들이 아직 건재하지만, 2세대, 3세대들이 커가는 것을 보면서 보람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