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9월에 태어난 당신은 먹을 게 많아 배는 안 고프겠네"

[송미옥의 살다보면2] 미역국은 한국인의 밥상에 일등 음식 미역국 먹다 떠올린 생일 관련 추억들 남편 생일 이틀 전이 시조모 생신이라···

2023-09-10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일 년에 한 번뿐인 태어난 날을 기념하는 생일. 요즘은 먹거리가 풍요로워 매일이 생일 같은 날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침 먹자고 불러서 앞집을 가니 소고기가 듬뿍 든 미역국이 놓여있다. 미역국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라 혼자 사는 나는 생일 핑계 삼아 9월 첫날부터 만들어 먹었다. 나는 며칠 뒤 있는 내 생일상을 미리 차려준 줄 알고 감동하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일 언니가 무릎 수술하러 서울 가느라 곰국 대신 끓인 거란다.

중년이 되어 삶의 고비로 힘들 때 친구의 손에 이끌려 용하다는 철학관엘 간 적이 있었다. 한문으로 쓰인 큰 액자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철학박사 자격증이라 했다.

“9월의 보석이군. 계절을 잘 타고나서 아무리 힘들어도 안 굶어. 살다 보면 힘들 때도 좋을 때도 있는 거지. 어디 보자···. 밑바닥에서 이제 올라가는 일만 남았네. 고목에 싹이 트는 중이라 지금 당장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피어.”

죽을상을 하고 찾아간 나에게 그 말은 큰 힘이 되었다. 용하다는 사람에게 들으니 더 그랬다. 하긴 봄이면 봄이라서 좋고 여름이면 여름이라 좋은 계절이 아닌가. 어찌 되었든 이렇게 좋은 말로 기운을 주고 난 후, 동쪽으로 조심하고 서쪽으로 살피고 어쩌고저쩌고하니 소심해진 어깨가 펴지고 희망의 씨앗이 돋아났다. 죽을 만큼 힘들 땐 어디든 기대어 볼일이다. 

돌잔치가 요란하다. 내 아이들에겐 못해 준 풍경이 부럽다. /게티이미지뱅크

결혼한 첫해의 일이다. 남편 생일은 음력으로 6월 중순이라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남편 생일 이틀 전은 칠순 넘으신 시조모의 생신이었다. 아이 생일은 기억에서도 밀려나고 며칠 전부터 어른 생신 준비로 어수선했다. 8월의 무더위에 냉장고도 없던 시골 마을, 음식 보관용 깊은 우물엔 무언가가 주렁주렁 매달려 보관되었다.

요즘은 잔치도 외식 한 끼 하면 끝나지만 그땐 멀리서 오신 친인척 어른은 눈도장만으론 실례였는지 짧아야 일박이고 이제 가면 언제 또 오나 노래가사처럼 며칠이고 계셨다.

너무너무 가난해도 손님용 밥상은 보기 좋게 차려야 했다. 할머니를 가장 사랑하고 좋아했던 남편은 그날만 오면 왠지 무기력해져서 방안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고 한다. 손님이 다 떠나고 나면 어머니는 앓아누우셨다. 시모님 챙기느라 어린 자식 생일상 한번 못 해준 엄마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나 역시 난생처음 많은 손님을 치르고 끙끙 앓았다. 몸살에 누워 있는데 친정엄마가 오셨다. (세상에서 제일 착했던 나의 새엄마.) 몸이 피곤해서 그랬을까 엄마가 유령처럼 보였다.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온몸이 땀에 젖어 비 맞은 듯 들어오신 엄마의 양손엔 케이크와 미역국이 들려있었다. 엄마는 사위의 첫 생일을 손수 차려주려고 밤새 온갖 반찬과 미역국을 끓여 먼 길을 들고 온 것이다. 그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친정엄마가 차려준 생일상 앞에서 남편은 오줌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더니 훌쩍거렸다. 해병대를 갓 제대한 덩치 큰 남자가 말이다.

가족 모두 깊은 마음속 응어리를 다 꺼냈는지 덩달아 훌쩍거렸던 시간이었다. 이상한 분위기에 촛불을 껐는지 안 껐는지는 기억이 없다. 그날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났어도 참 슬프고도 아름답게 남아있다. 올해도 나는 동생과 함께 먼저 간 남편의 생일을 기념하면서 우리가 대신 맛있게 먹었다.

세상이 바뀌어 동물도 생일상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얼마 전 생일을 맞은 손주에게 책을 선물하며 공부 잘하라 하니 인상이 별로였다. 종일 학교로 학원으로 보기 싫은 책과 씨름하는 아이에게 또 책과 공부라니··· 아차 싶었다.

누군가가 그랬다. 아이에게 축하하고 싶으면 선물은 크게 쏘고 눈으로만 말하고 고개만 끄덕이라고···. 삶이 폭폭한 요즘엔 말을 잘해도 잘 못해도 적을 만드는 세상이다. 특히 어른들의 라떼~ 정신을 아이에게 써먹으면 빵점짜리 어른이 된다. 생일 때마다 지렁이 글씨로 손 편지를 써주던 아이인데 아무래도 이번은 기대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흐흐.

이맘때가 되면 문득문득 고생만 하다 떠나신 양쪽 부모님들 생각이 더 난다. 건강한 일상을 주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감사하고 생일 핑계로 동네 어르신들께 따뜻한 밥이나 한 끼 대접해야겠다. 9월에 태어난 아름다운 당신에게 축하와 사랑을 듬뿍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