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희 더봄] 뒤풀이를 해야 하는 이유

[김정희의 좌충우돌 연기도전기] 배우는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뒤풀이를 해야만 한다

2023-09-20     김정희 그리움한스푼 작가

연극이 끝났다. 어떤 일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은 후련하고 기쁘다. 관객들이 많아 기쁨이 배가된다. 차려놓은 잔칫상에 손님이 북적거리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간다. 금상첨화로 그 손님들이 "맛있다"라며 입을 맞춘 듯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면  몸이 공중으로 둥둥 떠다닌다. 관객들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잔칫집 반찬이 입에 맞은 것 같다.

연극이 끝난 후, 사회자가 배우들과 함께하는 포토타임을 준다고 하자 하나둘 줄을 선다. 배우의 존재감을 느끼는 또 하나의 순간이 바로 포토타임이다. 줄 서는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은  피곤함을 물리치는 100mg 비타민보다 더 강력한 힘이다.  그런 관객이 있어서 배우는 또 무대에 서는 것 아닐까? 무대에서 힘을 다 소진해 무대 밑으로 내려가면 바로 쓰러질 것 같아도 박수 소리에 다시 기운을 낸다.

100m 달리기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이 확정되는 그 순간 바로 바닥에 주저앉아 기쁨의 울음을 토해내는 것이 아니라 웃으면서 천천히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돌 수 있는 힘은 플러스알파의 힘이다. 헐떡이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웃을 수 있는 여유, 다시 달릴 수 있는 에너지는 박수치는 관객이 있기 때문이다. 

포토타임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와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가 어둠 속으로 묻힌다. 불 꺼진 무대를 뒤로 하고 늦은 밤거리를 혼자 터벅터벅 걷는다. 순간 억제할 수 없는 고독과 허탈이 등 뒤로 덮친다. 그래서 뒤풀이가 필요한 것일까?

며칠 후 뒤풀이가 있었다. 벌겋게 타오르는 숯불 아래 지글지글 삼겹살이 구워지고 얄팍한 돼지고기가 자세를 바꾸는 순간순간, 끊이지 않고 수다와 소감은 이어졌다.

삼겹살이 지글지글 기름을 뿜어내며 구워지고 있다. 모두의 시선이 고기에게 집중된다. /픽사베이

무대를 뒤풀이 장소로 그대로 옮겨놓은 듯하다. 잘 익은 삼겹살을 상추에 싸서 큼직하게 한입 가득 밀어 넣는다. 오물거리는 입이 파도 타는 조각배 같다. 모두 낯선 배에 올라타 선장의 지시대로 노를 저으면서 풍랑을 이겨냈다.

배우는 과정은 힘들었지만 시간이 쌓일수록 풍랑을 이기는 힘이 생겼다. 그런 과정에서 선원들의 공통 분모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새>라는 연극이었고 공통 분모 위에 올라앉는 분자들은 각자의 배역이었다. 어설펐던 분자들은 흔들거리면서 제 자리를 찾아가 중심을 잡았다. 출발점이 비슷한 분자들은 제자리를 잡아가는 다른 분자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시간과 비례하여 배우들의 친밀도는 점점 두터워져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어색했던 연기도 조금씩 조금씩 자연스러워졌다. 그렇게 쌓인 정(情)이 뒤풀이에서 드러났다.  A는 B의 연기를 칭찬하고 C는 D와 스스럼없이 하이 파이브를 했다. 웃음과 수다 사이를 자연스럽게 가르며 가게 사장님의 말씀이 지나가는 나그네 1처럼 끼어든다. 아주 큰 소리로 단 한마디의 대사를 또렷하게 내뱉는다.

"우리 집 삼겹살 맛은 타 가게와 비교 불가입니다."

그 말꼬리에 올라타며 정말 맛있다는 누군가의 추임새가 따라붙는다. 동시에 빈 접시가 퇴장하고 새 접시가 등장한다. 등장한 새 접시는 누군가의 젓가락에 의해 금세 비워지고 지나가는 엑스트라처럼 재빨리 퇴장한다. 홀쭉한 배는 불뚝 솟아오르고 핏기 없던 볼은 벌겋게 홍조를 띤다. 가끔 지도 선생님과 재단 이사장님 말씀이 이어지면 모두 입 다물고 귀 쫑긋 세워 집중한다.

말하는 사람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다. /픽사베이

인생은 한바탕의 연극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카메라에 인생이 촬영된다. 때론 흥분된 인생이, 때론 찌그러진 깡통 같은 순간이 걸림 없이 촬영되어 차곡차곡 저장된다. 그것이 하루가 되고 일 년이 되고 그 누군가의 인생이 된다.

뒤풀이하는 지금 이 순간도 연극은 계속된다. 배우들의 상기된 얼굴 속에 승리자의 미소가 번진다. 오늘 우리는 모두 승리자이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음료수도 소주도 막힘없이 그대로 직진한다. 방해물이 없다. 이런 날은 입 안에서 씹혀지는 모든 음식이 연하고 맛있다.

관대함도 자동으로 따라붙는다. 박수도 자주 등장한다. 혈액순환도 잘 된다. 모두 얼굴색이 복사꽃 같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간 중간에 "좋아요"라는 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 찰나를 이용해 "여기 삼겹살 2인분 추가요"라는 후렴도 등장한다. 고기가 추가되면 소주도 뒤따라 업혀 나온다.

사람이 친해지는 도구는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술은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도구인 것 같다. 건배 한 번에 친해지는 속도는 두 배 이상이다. /픽사베이

기분 좋은 뒤풀이. 오늘은 많은 것들이 용납된다. 옆 사람의 옆구리 부딪힘도 “옳소”라는 장단 맞춤이고 넘치는 술잔도 ‘인정 많음’으로 통한다. 박수는 ‘부라보’의 동의어고 건배는 ‘즐거움’의 다른 표현이다. 상에 차려진 많은 음식이 자취를 감추고 혀가 두껍게 꼬여 집으로 돌아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늦은 밤거리를 독불장군 걸음으로 휘젓는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말을 수없이 내뱉는다.  오늘 한 말들이 이 순간 이후 기억되지 않아도 좋다. 오늘은 기분 좋은 뒤풀이로 족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