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기 더봄] 은퇴 후 인간관계는 어떻게?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만날수록 에너지가 느껴지는 사람이 필요 인생학교 같은 은퇴자를 위한 공간도 필요
사람들은 흔히 직장에서 맺은 인간관계가 은퇴 후에도 지속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은퇴하면 이해를 바탕으로 한 관계는 모래성과 같아서 만남의 기회가 옅어지며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끊어지기도 한다. 그제야 비로소 가족에게 눈을 돌리는데 가족은 가족대로 바쁘다. 아내는 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기 계발하느라 바쁘고 또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도 많다.
자식들은 어떤가. 그들도 바쁘다. 공부하느라 바쁘고 또 연애한다고 바쁘다. 그리고 언제 아버지가 저희 얘기에 귀를 기울여 준 적이 있던가. 매일 잔소리만 했지. 아버지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아이들은 아버지가 찾으면 뒤꽁무니부터 먼저 뺀다. 에이, 고얀 녀석들. 그동안 아이들과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한 걸 후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렇다고 아내처럼 동네에 마땅히 아는 사람도 없다. 그래서 은퇴자가 눈을 돌리는 것이 그동안 뜸했던 동창회다.
동창들은 같은 추억을 공유하고 있고, 그들 또한 얘기를 나눌 상대가 필요해 처음에는 잘 어울린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가치관이나 관심사가 다름을 알게 되고 어느 때는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다툴 때도 있다. 지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똑같은 얘기가 반복되면 그만 만남 자체에 회의가 든다. 결국 동창회에 나가는 빈도도 점차 줄어든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이런 아버지끼리 모임을 결성하는 건 어떨까. 바로 인생학교가 그런 기능을 하고 있다. 인생학교에 오니까 또래도 비슷하고 직장은 달라도 같은 관심사를 지닌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푸념하는 것도 비슷하다. 맞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또 어느 때는 폭소를 터트리며 맞장구를 친다. 강좌가 끝나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찻집이나 밥집을 찾는다. 그들과의 시간을 더 갖고 싶은 거다. 사실 인생 2막은 이처럼 만나면 만날수록 에너지를 느끼는 관계가 필요하다. 이렇게 설립한 학교가 벌써 10년이 되었다.
10년 이상을 사귀어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관계가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앞으로 10년이 흘러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다. 시간이 많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런 관계는 가능한 멀리하는 것이 좋다.
반면 한 번 만났을 뿐인데도 그의 인품이 어떤지 바로 알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라면 나의 속마음도 얘기하고 싶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그의 의견을 묻고 싶다. 그리고 그가 하는 일이라면 진정으로 돕고 싶다. 앞으로 남은 시간에 가져가야 할 인간관계다. 이런 사람이 한둘만 있어도 후반생이 외롭지 않을 것이다.
인생학교가 언론에 알려지며 지역 여기저기서 문의하는 곳이 많다. 한번은 지방 소도시 고등학교 동창 6명이 의기투합해서 연락이 왔다. 면면을 보니 대학에서 퇴직한 교수도 있고, 고교 교장을 역임한 사람도 있고, 은행지점장으로 퇴직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의욕은 있는데 학교를 결성하지는 못했다. 이 밖에도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았다. 왜 그럴까? 무엇보다 공간을 구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제일 많다.
그런데 우리 주변을 보면 공간이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여러 가지 규정이나 지역 이기주의로 공간을 활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폐교가 계속 늘고 경로당조차 공동화되고 있는데 시니어들은 쓸 수가 없다. 벤처기업을 양성하기 위하여 2년간 공간을 빌려주거나 예술가들에게 한시적으로 작업 공간을 빌려주는 것처럼 이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한시적으로 공간을 공공에서 대여해 주는 것은 어떨까.
실제로 어느 지자체에서 산하 도시에 베이비붐세대를 위한 캠퍼스를 기획하고 있다. 진정으로 이 계획이 성사되기를 빈다. 그래서 은퇴를 두려워하기보다 은퇴가 기다려지는 사람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중년 남자들의 자살률이 세계 1위라고 한다. 인생학교와 같은 커뮤니티가 전국으로 확대되면 그런 불명예도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