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형철 더봄] 엘리자베스 1세, 연적 메리를 죽이다
[한형철의 아리아 속 명작스토리] 권력과 사랑의 삼각관계, 그 진실은?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 아리아와 명작 감상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와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친족입니다(메리는 엘리자베스의 5촌 조카임). 스코틀랜드의 권력 다툼 와중에 남편인 단리 경의 죽음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던 메리가 왕위에서 쫓겨나고 1568년 잉글랜드로 도피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후손이 없는 상태에서 궐위될 경우, 혈통 상으로 왕위 계승 제1순위예요. 엘리자베스는 곤경에 처한 메리를 약 20년간 보호하였지만, 점차 메리가 구교도 등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자 권력 수호를 위해 결국 1587년에 그녀를 처형하지요.
이런 사실(史實)에 픽션을 가미하여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가 1800년에 쓴 희곡이 <마리아 슈투아르트>입니다. 실러는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여왕이 생전에 유일하게 실제로 사랑했던 레스터 백작을 오히려 메리의 연인으로 묘사하며 삼각관계를 설정합니다. 또한 메리를 처형하는 데에 부담을 느낀 여왕이 측근에게 메리를 암살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장면을 연출하지요.
무엇보다 역사상 엘리자베스와 메리가 서로 만난 사실이 없음에도 두 사람이 대면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합니다. 하지만 결국 메리를 살리려고 레스터가 주선한 두 사람의 면담으로 인해 오히려 메리는 처형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메리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하지요. 엘리자베스는 매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품에 날아든 새(메리)를 죽인 꼴이 되었습니다.
오페라 <마리아 스투아르다>는 이탈리아 작곡가인 도니체티가 실러의 위 희곡을 원작 삼아 작곡하여 1835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하였습니다. 긴박한 극적 구성 속에 등장인물들의 예리한 갈등이 도니체티 특유의 아름다운 벨칸토 음악과 잘 결합하여 펼쳐지지요.
반역죄로 포더링헤이 성의 감옥에 갇힌 메리 스튜어트에게 이미 사형판결은 내려졌고, 그 집행서에 여왕의 결재를 앞둔 상황에서 오페라는 시작합니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나 메리는 권력 투쟁을 벌이는 여왕보다는 여성의 본성을 더 강하게 나타내며, 따라서 둘 사이의 알력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여인들의 다툼으로 표현되지요. 자~ 오페라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서정과 비감미를 동시에 전해주는 선율과 경쾌한 리듬을 선보이는 서곡을 연주하며 막이 올라가고, 레이체스터(레스터 백작)는 엘리자베타(엘리자베스1세)에게 자비를 베풀어 마리아(메리 여왕)를 한번 만나줄 것을 청합니다. 여왕은 자신이 사랑하는 레스터가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고, 감옥에 갇혀서도 남자들을 유혹하고 있다며 마리아를 질투합니다. 자신의 연적에게 모욕을 되갚아 줄 심산으로, 마리아에 대한 레이체스터의 면담 요청을 수용하지요.
장면이 바뀌면, 마리아가 갇혀 있는 포더링헤이 성입니다. 그녀는 프랑스에서 온 구름이 자신의 고통과 한숨을 평화로운 프랑스로 데려가 주기를 소망하지요. 실제로 그녀는 처형되기 직전 자신의 시신을 프랑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는군요. 그녀의 바람대로 그녀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웠을 프랑스 시절로 그녀를 데려가 주려는 듯 음악도 아름답게 흐릅니다.
레이체스터가 미리 마리아를 찾아와 여왕이 오면 절대 자극하지 말고 선처를 호소하라고 조언합니다. 엘리자베타를 대면하자 마리아는 내키지 않지만 여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왕좌에서 쫓겨난 처지를 호소합니다. 하지만 엘리자베타는 사악한 그녀의 영혼이 자초한 일이라며 그녀를 비난하지요. 레이체스터의 격려로 겨우 지탱하던 마리아의 자제력은, 여왕이 레이체스터를 몸으로 유혹했느냐고 비아냥대자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그녀는 엘리자베타에게 저주를 퍼붓습니다.
앤 불린의 천박한 딸···
천박하고 음탕한 매춘부···
당신이 불명예에 대해서 말하다니?···
생모 앤 불린이 결혼 무효 및 사형을 당하여 사생아라는 꼬리표가 달렸던 엘리자베타의 가장 취약하고 민감한 약점을 난도질한 거예요. 여왕은 격정의 아리아 ‘가라, 미친 여인이여’를 부르며 분노를 터트리고, 마리아는 오히려 “이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다”며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미소를 짓는답니다.
‘가라, 미친 여인이여’
여왕의 집무실에 돌아온 엘리자베타는 마리아의 처형문서를 결재하려다가 혈족을 죽인다는 세상의 비난 때문에 잠시 주저합니다. 그때 레이체스터가 들어오자 여왕은 다시 질투가 일고 서둘러 사형집행서에 서명합니다.
집행서를 보고 선처를 읍소하는 레이체스터에게 엘리자베타는 오히려 사형집행의 입회인을 명령하지요. 아~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그녀의 처형을 집행해야 하다니··· 레이체스터는 자신의 어이없는 운명이 고통스러워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단두대에서 세 번의 대포 소리가 울리고, 집행관이 마리아의 검은 겉옷을 벗기자 붉은 빛 드레스가 드러나지요. 그녀는 차분하고 의연하며 우아한 몸짓으로 최후를 맞이합니다.
대부분의 회화와 오페라는 물론, 세어셔 로넌 주연의 <메리, 퀸 오브 스코틀랜드>와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엘리자베스> 등의 영화에서도 메리의 처형 장면에서 성스러운 붉은 의상을 연출합니다. 이는 그녀에게 순교자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으로, 우리네 역사 중 권력을 쥔 세조에게 제거된 단종의 넋을 위로하는 사례처럼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