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재 칼럼] 부모가 하버드면 나도 하버드?···기로에 놓인 '레거시'

[김성재의 국제금융 인사이트] 부모 찬스가 관행된 美 '레거시' 제도 사립대 40%, 레거시로 입학생 선정 "인재 육성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2023-07-24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미국의 대학 등록금은 비싸기로 유명하다. 해당 주에 거주하는 미국 공립 대학생은 1년에 1만 달러 이상의 등록금을 낸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300만원이 넘는다. 소수 정예 엘리트가 들어가는 명문 리버럴아츠 대학의 연간 학자금은 6만 달러 안팎이다. /언스플래쉬

매우 드문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이었다. 학과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으니 연락해 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무슨 일이 있을까 의아해하며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선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놀라웠다. 남은 3년간 등록금 전액을 받는 장학생으로 선정됐다는 뉴스였다.

지방 출신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던 필자에게는 천군만마와 같은 희소식이었다. 장학금을 받아 등록금을 내고도 돈이 남아 몇 권짜리 책 한 질을 통째로 사서 읽기도 했다. 만약 장학금을 받지 못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남의 신세를 져야 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출에 의지해야 했을 것이다. 서울에 유학 와서 하숙해야 했으니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당시 국립대학 한 학기 등록금은 웬만한 회사 직원 한 달 월급이면 해결됐다. 사립대학 등록금은 그보다 많아 한 달 반이나 두 달 월급 정도였다.

최근 국내 대학 등록금은 필자가 대학에 다니던 80년대보다 대여섯 배 오른 듯하다. 그래도 월급과 비교하면 당시나 요즘이나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는 듯하다. 반면 미국 대학 등록금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비싸다. 

최근 한 자료에 의하면 미국 공립대학의 그 주 거주자에 적용하는 연간 학자금은 1만 달러가 넘는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1년에 1300만원이 넘는 돈이 든다는 얘기다. 다른 주 출신이 그 주 공립대학에 입학하면 2만3000달러가 소요된다. 사립대학은 평균 학자금이 4만 달러다.

이른바 명문대학으로 가면 학자금 수준은 아찔하기까지 하다. 캘리포니아 소재 명문 주립대인 버클리대학에 타주 출신이나 외국 학생이 다니려면 1년 학자금이 4만4000달러가 든다. 소수 정예 엘리트가 들어가는 명문 리버럴아츠 대학의 연간 학자금은 6만 달러 안팎이다.

예일·듀크·브라운·코넬 같은 대형 명문 사립대 학자금은 6만5000달러에 육박한다. 우리 돈으로 8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4년이면 3억원이 넘는 비용이 소요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굳이 대학에 가야 하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많은 연구가 보여주는 결과는 대학에 가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고등학교만 나온 경우보다 평균적으로 4배 정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그 차이는 명문대학으로 갈수록 더 커질 것이다.

하지만 미국인의 소득으로 대학 학자금을 감당하기는 터무니없이 어렵다. 미국인의 평균 연봉은 6만 달러에 미치지 못한다. 가계 연 소득의 중간값(median)은 7만 달러 정도다. 1년 번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다 모아야 겨우 한 자녀 학비를 댈 수 있다.

미국 입시에는 대학 지원자의 학부모나 친지가 그 대학 동문일 경우 가산점을 부여하는 '레거시(legacy)' 제도가 관행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미국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시어도어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 등도 정치 명문 가문 덕으로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어도비 스톡 

물론 대학들은 장학금이 많다고 홍보한다. 실제 많은 학생이 장학금 혜택을 입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첫 해 입학 당시에 받은 장학금이 그다음 해에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대학인 하버드를 보자.

이 대학 홈페이지를 보면 재단 유보금(endowment) 규모가 509억 달러라고 나와 있다. 우리 돈으로 66조원이 넘는다. 가계로 보면 그간 그 집안이 이런저런 방법으로 저축해 모은 재산의 규모가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적립해 모은 국민연금 기금의 7%에 해당한다.

하버드는 또한 작년 대략 7억 달러에 좀 미치는 돈을 장학금으로 지급했다고 한다. 이 대학은 내년 연간 가계소득이 8만5000달러에 미치지 않는 학생에게는 아예 등록금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연소득이 1억1000만원이 되지 않으면 학자금이 한 푼도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매우 솔깃한 얘기다. 그런데 하버드는 신입생 가운데 펠그랜트(Pell Grants)라는 연방정부 장학 프로그램 대상이 되는 학생의 비율이 대략 20%라고 밝혔다. 학부모의 재정 지원 여력이 학자금에 미치지 못하는 학생은 대개 펠그랜트를 받을 자격이 된다.

1년 학비가 6만 달러인데 부모 소득과 생활비를 감안해 빚을 내지 않고 이 학비를 지원하기 어렵다면 펠그랜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6만 달러 정도 저축할 여유가 있지 않은 한 자격이 주어진다. 아마도 대부분의 중산층 이하 가정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하버드 신입생의 80% 정도는 어느 정도 또는 상당히 부유한 집안 출신이라는 말이 된다. 우리가 아는 역대 미국 대통령 중에도 부유한 가문에 하버드 출신이 있다. 존 F. 케네디·시어도어 루스벨트·프랭클린 루스벨트·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 모두가 자기 실력만으로 하버드에 입학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말만 들어도 아는 정치 명문인 케네디·루스벨트·부시 가문의 백그라운드 덕을 본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한국이라면 "공정해야 할 대입에서 가문의 혜택을 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펄쩍 뛸 것이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온갖 비난과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미국의 명문 사립대학에서는 가능하다. 가능할 뿐만 아니라 입시에서 관행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이른바 '레거시(legacy) 합격'을 통해서다. 대학 지원자의 학부모나 친지가 그 대학 동문일 경우 가산점을 주는 제도다.

최근 조사에 의하면 미국 사립대학의 40% 이상이 레거시 지위를 입학 사정에 반영한다고 한다. 하버드의 경우 대략 30% 안팎의 합격생이 어떤 식으로든 레거시와 연결돼 있다. 이들 대부분이 우리나라 수시에 해당하는 조기 전형을 통해 합격한다.

레거시라고 하여 다 같은 것도 아니다. 대학에 따라 정책이 다르겠지만 부모가 그 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기부나 봉사활동을 통해 기여를 했을 때 가장 큰 가산점을 받는다. 대학원을 나왔거나 조부모 또는 가까운 친척이 동문일 경우 가산점이 줄어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모가 동문인 경우 명문 사립대 합격 가능성은 45%나 높아진다고 한다. 수능(SAT) 점수 160포인트를 올리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연구 결과도 있다. 레거시 없이는 1450점을 받아야 합격할 수 있다면 레거시가 있으면 1300점 밑의 점수를 받아도 합격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미국의 명문대들은 왜 레거시를 입시에 반영하고 있을까? 그것은 대학재단의 가장 많은 부분을 동문의 기부금으로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명문가 자손이 명문대학에 들어가 졸업하고 그 대학 간판으로 좋은 직장을 얻어 재산을 축적하고 그 일부를 대학에 기부해 레거시 점수를 확보하고 이를 통해 그 아이가 또 그 대학에 들어가 장래 가능성을 높이는 사이클이다. 

대학과 동문 입장에서는 윈윈-게임이다. 그러나 레거시 합격이 계층 간 이동의 사다리를 줄이는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부유한 동문 집안 자제가 유리한 점수를 받기 때문이다. 최근 미연방대법원은 입시에서 인종적 요소를 고려해 가산점을 주는 제도가 위헌적이라 판결했다.

이와 맞물려 레거시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존스 홉킨스나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같이 레거시를 입시에 반영하지 않는 명문대도 늘어나고 있다. 대학들은 전통 및 재정 확보와 형평성 제고의 요청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배우기를 좋아하는 학생을 뽑아 인재로 육성하는 것이 대학 본연의 임무라는 사실을 가슴에 새겨야 한다.

※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김성재 가드너웹대학교 경영학교수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종합금융회사에서 외환딜러 국제투자업무를 7년간 담당했고 예금보험공사에서 6년간 근무했다. 미국에서 유학하여 코넬대에서 응용경제학석사, 루이지애나주립대에서 경영학박사 (파이낸스)를 취득했다. 2012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주 가드너웹대학교에서 재무·금융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