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치매걸리거든 이렇게 해다오'··미리 적어두는 내 습관, 'ACP 제도'
치매 환자 의사 결정권 대체 주목 법적 효력 없지만 돌봄에 큰 도움 한국 도입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72세 마쯔코 씨의 '나 사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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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운 음식을 먹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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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왼쪽 검지 손가락을 많이 사용하면 통증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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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리현상이 심해서 스스로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플 경우 조용히 세상을 떠나게 해주세요.
일명 '나 사용법'이라고 하는 ACP 제도가 일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Advanced Care Planning'의 약자로 '사전에 (Advanced)', '돌봄, 배려, 의료, 간호, 요양 등 다양한 케어 (Care)', '계획 세우기 (Planning)'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치매로 인해 기억력이 점점 흐려지는 환자의 의사 결정 권한을 보장하기 위한 제도다.
4일 여성경제신문의 취재를 종합하면 해당 제도는 중증 혹은 말기 치매 환자의 의사 결정 권한을 대체하기 위해 일본에서 도입된 제도다. 법적 효력은 없지만 치매 환자가 기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상황이 악화하면 기존에 환자가 작성해 둔 ACP를 기반으로 환자 돌봄이 진행된다.
ACP는 '인생 회의'라고도 불린다. 작성 초기 단계부터 지자체 담당 공무원과 가족이 함께 보는 앞에서 환자가 각 항목에 맞게 작성하도록 유도한다.
도쿄도의 ACP 매뉴얼을 보면 작성 항목은 크게 △지금까지 삶에 대해 △생활에 관해 △서비스에 관해로 분류된다. '지금까지 삶에 대해' 항목에서는 '내가 지금까지 소중하게 여겨온 것들', '앞으로 소중하게 하고 싶은 것들', '나의 삶에 관한 생각'을 적도록 했다.
'생활에 관해'에서는 '앞으로 누구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디서 어떤 돌봄을 받고 싶은지', '음식을 먹지 못할 때의 대응', '임종 돌봄을 받길 원하는 사람', '식사 메뉴와 빈도' 등의 내용이 담겼다.
'서비스에 관해' 항목에서는 '의료적 연명 조치에 대한 의사 결정', '심폐소생 처방 여부', '의사 표현이 불가능할 때의 의사 결정 주체'를 적도록 했다.
이처럼 현재의 ACP는 '노인이 장래에 병에 걸리거나 돌봄이 필요해진 경우, 앞으로도 지키고 싶은 생활 습관, 누구와 함께 어떻게 지내고 싶은지, 희망하는 의료 및 복지 서비스의 형태 등을 사전에 협의하여 이를 실천하는 과정'을 기본 내용으로 한다. 각 지자체는 ACP에 관한 안내문과 노인의 의사 결정을 기록하는 메모 책자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일본 현지에서는 노인 요양 시설에 입소한 환자 대부분이 해당 ACP를 가지고 입소한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교토시의 한 요양원 요양보호사는 "환자가 입소할 때 해당 환자의 특성과 요구사항이 자세히 적혀 있어 돌봄 서비스를 제공할 때 한결 편리하다"며 "환자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알 수 있어 환자와의 갈등도 줄었다"고 설명했다.
ACP 제도의 한계점도 존재한다. 당사자가 비협조적일 경우 초기 작성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 한 예시다. 이는 일본 내 문화적 특성에 기반한 것으로 일본의 노인 세대는 미래 결정에 대해 가족 및 주변인과 상의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는 것. 특히 남성의 경우 가부장적 리더십 성향이 강한 탓에 자기 생각을 남과 공유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결정이 남에게 영향을 받는 것을 싫어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가 이용하는 시설을 변경하거나 병세가 악화하여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경우 ACP의 내용이 다음 기관에 원활히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또한 법적 효력이 없기 때문에 위급한 상황에서 지역 내 관계 기관들이 ACP를 확인하고 변경 내용을 실시간으로 공유하기가 어렵다는 점도 해결 과제로 지목된다.
한국에서는 가족 간의 유산 상속, 입소자와 서비스 공급자 간의 소송 등과 같은 불미스러운 사례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ACP 제도의 도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많다. 특히 요양원 내에서 환자와 요양보호사 간에 갈등이 생겨 입소 환자 보호자가 요양보호사를 고소하는 사건이 최근 늘고 있는데, ACP를 통해 이러한 사건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꼽힌다.
실제로 국내 한 요양원에서는 환자가 낙상 사고를 당한 것에 대해 불만을 품은 입소자의 가족이 요양보호사를 고소한 사건이 최근 발생했다. 이로 인해 요양보호사와 시설장은 각각 300만원, 500만원가량의 벌금을 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설 측은 입소자가 평소에 행동이 과격하며 이유 없이 침대에서 나오고 싶어 하는 등 행동 장애가 심한 중증 치매 환자라서 낙상 사고가 자주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입소자 가족은 환자가 평소에 행동 장애가 심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측의 주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중증 치매 환자의 의견을 법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ACP 제도가 도입된다면 갈등이 줄어들 수 있을 것으로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
권태엽 한국노인복지중앙회 회장은 "노인의 의사 결정을 지원하는 것은 노인들의 불안을 줄이는 것뿐 아니라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돕는 것을 의미한다"며 "일본은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한 상황에서 이러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충분한 논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의사 결정의 자유는 기본 권리에 해당하는 문제이며, 노인의 존엄성과 인권을 존중하는 데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ACP 제도는 중증 혹은 말기 치매 환자의 의사 결정 권한을 대체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다. 해당 제도를 통해 환자의 의사를 사전에 기록하고 의료 및 복지 서비스 제공 시 이를 참고하여 환자에게 맞는 돌봄을 제공할 수 있다. ACP 제도는 일본에서는 이미 일반화되어 적용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노인의 의사 결정을 존중하고 보호하기 위해 도입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돌봄 업계는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