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이야기] 내 삶이 폐쇄되다

유현숙『엄마의 방』연재 4화 24시간이 모자란 엄마 돌봄의 삶 비 오는 날엔 옥상에서 골프 스윙 조울증과 우울증 증세가 찾아오다

2023-06-15     최영은 기자

엄마 집으로 오면서 이런저런 것들을 다 버렸다. 차 없이는 외출 못 하는 내가 자동차까지 정리했다. 엄마에게만 집중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엄마와 생활하다 보니 외출도 불가능했다. 24시간을 엄마 곁에 있어야 했다. 나는 나무에 붙어 날갯짓도 불가능한 매미였다. 이러다가 죽어서 속은 텅 비고 매미 형태만 남아 산산이 부서져 버릴 매미 껍데기 처지가 될 것 같았다.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집 안에서만 살아야 해 인맥 관리도 외부 활동도 정지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골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운동이라고는 집에서 가까운 한강을 엄마와 함께 걷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들과의 만남도 외출도 모두 집 안에 갇혀버렸다.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시작됐다. 어찌 보면 우리 엄마는 복된 삶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는 치매 환자를 케어해야 한다.

그럴 때 누가 모실 것인가. 비용은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문제로 가족들의 갈등이 심각하다. 특히 경제적 문제로 일을 놓을 수 없을 경우 치매 환자만 피해를 보게 된다.

정부에서 치매를 국가가 책임지겠다고 했지만, 지금 상태로는 별 도움이 안 된다. 치매 가족이 있으면 가족들의 삶과 정신이 피폐해진다. 가족들의 관심 없이 누군가 혼자 감당하기란 불가능하다. 가족 중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 집의 경우 내가 가장 적합했다.

엄마와 가장 친했고 엄마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결혼 후 지금까지 나는 항상 엄마와 함께였다. 우리 집 옆 라인에 살거나 앞쪽 단지에 살았다. 그리고 자식들이 결혼해 모두 떠나자 넓은 아파트가 무섭고 관리비가 많이 나온다며 내 집과 직선거리 30미터쯤으로 이사했다.

사실 딸이 하나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평소에도 내가 며칠씩 해외 출장을 가면 엄마는 몹시 불안해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가장 아끼는 강아지 딸을 맡기고 어디든 갔다. 이제 엄마는 시설에 계셔서 강아지를 맡아줄 수 없다.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까지 엄마가 돌보고 살림도 맡아주었다. 나는 비리를 보면 앞뒤 생각 없이 해결하고 보는 성격이다. 직업 정신 때문이기도 한데, 비리에 눈 못 감는 나를 교장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내 아들에게 부당한 행동을 하는 학교장의 비리를 파헤쳐 수십 년간 전통이란 이름으로 이어져 온 불합리한 문제를 해결했다. 전사가 되어가는 내게 아부 파 학부모들은 전통을 따르라고 했다.

일이 이쯤 되자 부창부수라 했던가. 남편이 그랬다. 한잔하면서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와. 교장 당신은 명예도 퇴직금도 걸려 있지만, 우린 터뜨리고 이 나라 뜨면 된다고 해.

그즈음은 아들이 미국 유학을 정말 가고 싶어 할 때라 이민 가방 하나 챙겨서 혼자 텍사스로 방목해 버렸다. 꼴불견인 학부모들과 꼴불견 교사들, 못마땅한 이 나라의 입시 위주 교육이 싫었다.

정나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에서 학부모로 살기를 포기했다.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건 아들이다. 난 100점 학부모는 못 돼도 100점 엄마라고 자부한다.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하며 넓은 미국 땅에 홀로 방목해 정신도 몸도 누구보다 성숙한 멋진 내 아들.

이 또한 엄마가 내 곁에 있어 가능했다. 나는 아들이 미국으로 떠날 때 걱정이나 서운함도 없이 “자유다!”하고 외쳤다. 그런데 공항에서 울음이 터진 엄마는 집에 올 때까지 울었다. 나를 보고 독하다고 하면서.

엄마와의 이런저런 추억은 거의가 내 아들과의 사이에서 생겼다.

“할머니, 노인대학 언제 졸업해요? 나랑 같은 대학 가서 할머니 내 차 타고 다니실래요?”

아들은 유머도 있고, 할머니를 자기 인생에서 떼려야 뗄 수 없다고도 했다. 숨통이 막혀 올 때면 이런 에피소드들을 꺼내며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엄마도 이런 얘기를 꺼내면 무척 즐거워했다.

사람들은 아들이 셋이나 있는데 왜 딸이 나섰느냐고 했다. 그때마다 내 엄마를 내가 맡아야지 누구에게 맡기냐며 셀프 효도 시대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요즈음은 엄마에게 딸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다.

아들 하나밖에 없는 나를 엄마가 걱정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엄마가 아프다고 아들 며느리에게 돌보라고 하는 게 며느리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일까 싶다.

내가 엄마 집으로 들어오면서 생각했던 것은 3년 정도였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내가 모셔야 나중에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대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후회하고 울고불고한다. 돌아가신 다음에 우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사람인지라 갇혀 살며 내 삶을 멈췄을 땐 내게 너무 화가 났던 적이 많다는 것을 고백한다. 누군가가 차 한잔하자, 밥 한 끼 먹자 해도 밖에 나갈 수 없으니 아쉬운 사람이 집으로 찾아오라고 했다. 사람들과의 소통이 어렵고 잠시도 집을 비울 상황이 되지 못하니 숨이 막혀 죽을 것만 같았다.

내 갇혀버린 삶은 정신까지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엄마를 모시고 옥상으로 올라가 식물을 가꾸는 게 유일하게 숨통 트이는 일이었다. 비 오는 날엔 음악 크게 틀고 자유로나 올림픽대로를 내달리며 스트레스를 풀던 나였다.

비 오는 날의 빗소리는 그런 나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 날이면 골프채를 하나 뽑아 들고 옥상에 올라가 비를 맞으며 미친 듯이 골프채를 휘둘렀다.

비 오는 날에는 아무도 날 볼 수 없으니 골프채도 맘껏 휘두르고, 복받쳐 오르는 눈물도 꾸역꾸역 삼킬 필요가 없었다. 소리 내어 울어볼 수도 있었다. 누가 봤다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을 것이다.

이런 날이 늘어갈수록 내 정신은 죽어갔다. 심지어는 다시 심장마비가 오는 줄 알 만큼 가슴이 떨리고 숨이 멎을 것 같았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없었다. 우울증이 깊어져가고 불면증의 나날이 이어졌다.

내가 나를 컨트롤할 수 없게 변해갔다. 정신력도 강하고 인상까지 강해 보인다는 평을 듣던 내가 그토록 무너질 수 있다는 게 나를 더 화나게 했다. 감정도 어느 때는 조울증 증상을 보이다가 우울증 증상을 보였다. 정신 컨트롤이 안 됐다. 치매 엄마 옆에서 내 정신이 이렇게 컨트롤 안 된다면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야생 생활에 익숙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 갇힌 동물 같았다.

체력도 급격히 떨어져 이층 엄마네 집을 오르내릴 때 휘청하며 굴러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던져버린 채 그냥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큰동생은 항상 엄마의 병원 약을 타 오고 엄마와 내가 먹을 것들을 사다 날랐다. 동생은 어려서부터 부모님이 조부모님께 하던 모습을 보며 자라서인지 엄마를 직접 모시지는 못해도 큰아들로서 최선을 다했다. 사실 동생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는 생일이든 어버이날이든 엄마와 나를 똑같이 챙겨주었었다.

내 체력이 거의 바닥을 보일 때 큰동생은 엄마와 나를 용하다는 한의원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진료실에 들어간 엄마가 그만 대변을 쏟고 말았다. 당황스러웠다. 엄마를 화장실로 모시고 가서 씻기고 진료실도 닦아내야 했다.

그리고 가방에 넣어 간 여분의 기저귀를 입히고 엄마를 화장실에 앉혀둔 채 근처 쇼핑몰로 내달렸다. 나는 반바지 하나를 사서는 헐떡이며 달려왔다. 그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른 뒤 침도 맞고 엄마와 내 보약 한 제씩을 맞추고 돌아왔다.

며칠 뒤 한약이 배달되었다. 그러나 내가 항상 다니던 한의원이 아니어서인지 내 몸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갇혀 지내는 동안 나는 시간도 날짜도 잊고 지냈다. 정신적 혼란이 계속되다 보니 자꾸 극단적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의 치매가 시작되기 몇 년 전에 농장에서 말벌에게 여러 방을 쏘였다. 119 응급차에 실려 가 응급실에서 이틀 만에 깨어났다. 그리고 두 달 뒤 급성 심근경색이 찾아와 응급실도 못 들른 채 곧장 수술실로 들어갔다.

그 뒤 내 몸은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나도 환자인데 치매 엄마를 돌봐야 하는 운명이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진 상태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루라도 빨리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나는 우울증을 정신의 감기라고 생각했다. 현대인은 신경정신과를 내과나 이비인후과 가듯 자연스럽게 갈 수 있는데 왜 색안경 끼는 사람들을 의식하는가!

이런 소신으로 살아온 내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병원 가기를 미루던 어느 새벽,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더니 숨쉬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밤을 꼬박 새우고 병원 문 열리기를 기다려 평소 눈여겨보았던 집 근처의 신경정신과로 달려갔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심장을 시술한 병원으로 가지 않고 왜 신경정신과로 달려갔는지 신기하다.

『엄마의 방』표지 /창해

신경정신과에서는 공황장애와 조울증과 우울증이 있다며 약과 수면유도제를 처방해 주었다. 병원 약을 먹으니 심장도 안정을 찾아갔다. 명의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마도 내가 수술받은 대학병원에 갔더라면 예약 없이 갔으니 이런저런 검사에 엄청난 기다림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병원 원장을 하는 선후배 친구들이 나를 돌팔이 의사라 놀린 것이 맞는 말이었나 보다.

그래, 난 돌팔이로 살 거다. 이 나이에 공부해서 어느 세월에 의사 면허를 따겠는가! 타인에게 의료 행위를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쩌라고! 나 아플 때 어떤 병원을 찾아갈지만 아는 것도 다행이지, 뭐.

그렇게 말하기는 해도 책꽂이에 꽂힌 책 중 언제든 자주 꺼내 보는 것이 의학 서적이다. 특히 엄마의 치매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검색하고, 유명한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이제 안부 인사가 아니라 엄마 문제로 전화를 걸었다. 선배들은 얼마나 귀찮았을까? 바쁜 분들에게 너무 폐를 끼친 것 같아 죄송하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 급하다고 전화부터 걸고 보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 위 이야기는 유현숙의『엄마의 방』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