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도 말리는 자사주 소각인데···韓 금융위 불결한 동맹 조짐

금융위 증시 활성화 위해 강제하려 하지만 삼성·SK·현대 조짐 감지하고 이미 엑시트 '투자' 중시하는 '글로벌 트렌드'와 정반대

2023-05-24     이상헌 기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무분별한 자사주 소각에 대해 제동을 걸며 나선 가운데 한국 금융위원회는 증시활성화 대책 중 하나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 카드를 고려하고 있다. 사진은 미국 뉴욕 월스트리트 전경 /AP=연합뉴스

"기업의 자사주 매입 소식은 주가를 끌어올리는 호재다. 사들인 자사주만큼 유통되는 주식이 줄어들어 시가총액 대비 주식 가치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기존 주주의 의결권도 비례해서 강해진다." -주식시장 참여자

"우리가 발행한 회사 주식을 다시 사들이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가 있다. 무엇보다 포이즌필이 없는 국내에선 적대적 기업결합(M&A)에 대한 방어장치가 된다. 또 이와는 별개로 자사주를 매각해 자금을 확보하거나 상여금 지급 및 현물배당 옵션도 둘 수 있다. 대규모 M&A와 같은 유사시 거래대금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기업 경영인

EPS(순이익÷주식 수) 논쟁이 시작점
매입 문제없지만···소각은 부작용 커

자사주를 매입하면 유통 주식 수가 줄어들기 때문에 기업과 주주 모두에게 이득이다. 따라서 자사주 매입 자체를 막을 이유는 없지만 자사주를 소각하는 것은 △기업의 중장기 성장 △주주 간 형평성 △조세 정의 측면에서 해악이 매우 커 소각은 금지해야 한다는 것이 글로벌 자본시장의 트렌드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는 자사주 소각을 의무화하는 제도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주주행동주의 노선에 가까웠던 미국 바이든 대통령마저 자사주 소각 의무화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기업 투자를 중시하는 상황에서 한국 정부만 거꾸로 월가의 탐욕과의 불결한 동맹(unholy alliance)을 선택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25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따르면 미국 내 상장 기업의 자사주 매입이 2021년 9500억 달러에서 지난해 1조2500억 달러가 넘는 신기록을 달성했다. 올해도 상승세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바이든 대통령이 국정연설에서 자사주 매입에 대한 세금을 4배(1%→4%) 인상할 것을 시사하며 급제동을 걸었다.

미국에선 자사주를 매입 즉시 소각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제도로 인해 자사주 소각이 남발(주주환원율의 3분의 2를 차지)하면서 중산층이 붕괴하는 동안 월가만 살찌운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 왔다. 이에 미국 정부도 경영진과 주주들이 단기 성과를 나눠 먹는 것이 아닌 장기적 투자와 일자리 창출로 기업을 유인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반면 금융위원회는 증시 활성화 대책으로 자사주 소각 의무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위원장인 금융위원회 산하 정책자문 기구 금융발전심의회가 선봉에 섰다. 기업이 자사주를 매입하고 바로 소각하면 주당 순익(EPS, 순이익÷주식 수)에서 분모가 줄어들어 현재 주주들에게 유리해진다는 논리다.

물론 증권가에서도 "외국에선 적극적으로 이뤄지는데 자사주가 왜 한국에서만 유독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쓰이느냐"는 불만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는 미국과 한국의 자사주 해석 방식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미국법은 자사주를 미발행주식으로 보지만 국내법은 자산으로 인식하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즉 구조적으로 미국(100%)과 한국(18%)의  주주환원율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자사주는 일반적으로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을 발행한 회사가 소유하는 법적 지위를 가리킨다. 이를 자산으로 보는 한국에선 신주인수권을 주주의 법정 권리로 인정하는 동시에 제3자 배정 등을 엄격히 금지한다. 아울러 자사주를 소각하는 경우에는 해당 거래를 자본거래로 취급해 적극 과세하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1월 12일 워싱턴 DC 아이젠하워 행정부 건물에서 연설하고 있다. /백악관

美 미발행 vs 韓 자산···관점부터 달라
자사주 보유=사익 추구 근거 없는 억측

단기 이익 추구 헤지펀드 배불리는 꼴

다시 말해 자본시장법에 자사주를 반드시 소각해야 한다고 정하면 어떤 기업도 자사주 자체를 취득하려 하지 않을 유인이 크다는 것이 재계의 우려다. 실제로 정부의 움직임을 미리 감지한 삼성물산은 3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전량 소각하겠다고 지난 2월 밝혔다. SK그룹, 현대차그룹도 이미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한 상태다.

지난해 자사주 소각을 위해 낸 공시 건수도 2021년 32건에서 64건으로 두 배 늘었으며 올해 들어서는 이미 11건이다. 현대차(3154억원), KB금융지주(3000억원), 메리츠화재(1792억원), 신한지주(1500억원), KT(1000억원), 한국콜마홀딩스(537억원), 풍산홀딩스(86억원) 등이 자사주 소각을 예고했다.

자사주를 보유하며 기간을 두고 경영 판단을 하는 것이 지배주주의 부당한 사익 추구라는 비난을 받을 바에 어차피 유통할 수도 없는 주식을 털어내는 방향을 선택한 것이다. 또 이들 기업이 자사주를 대거 소각해도 주가가 제자리인 것을 보면 코리아 디스카운트 회복 효과도 크지 않아 보인다. 

자사주를 매입 즉시 소각해야 한다는 입장인 김우진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자사주를 시간이 흐른 후에 시장에서 처분하는 것은 투자자에겐 신주가 발행된 것과 같다"며 "이를 막을 수 있는 규제가 있어야 주주가치 제고라는 자사주 매입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정부가 자사주 소각 규제에 나선 것과는 정반대의 논리다. 지금까지 자사주 소각 시스템에 올라타 억만장자가 된 칼 아이칸(Icahn & Co.), 다니엘 롭(써드 포인트), 폴 싱어(엘리엇) 등의 헤지펀드가 기업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지적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SEC는 정보 공개 수준을 강화하는 새로운 공시 규정을 발표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이번 논란과 관련 "자기주식 취득과 처분은 한국 상법이 인정하고 있는 외부 세력의 경영권 공격에 대한 유일한 방어 수단인데 금융위는 이제 이것마저 없애겠다는 것"이라며 "미국과 법체계와 내용이 상이한데도, 외국 법의 일부만을 보고 오랫동안 유지해 온 제도를 함부로 손댄다는 것은 한국 자본시장 기본법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