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한국의 베로나···춘향전부터 혼불, 미스터 선샤인까지
[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로맨틱한 밀회와 사랑 그리고 피 흘리는 혁명 벼슬보다 좋다는 러브, 러브가 무엇이오? 총쏘기보다 어렵고 더 위험하고 뜨거워야 하오
남원 하면 두말이 필요 없이 춘향이 떠오른다. 남원을 대한민국 사랑의 고장이라고 부르는 이유이자 역사다.
사랑의 도시라면 이탈리아 베로나가 유명한데 베로나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애절하고 슬픈 사랑이 깃든 데 비해 대한민국 남원은 춘향이와 이몽룡의 애틋하고도 강인한,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 결국 승리하는 사랑의 도시다. 엄연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 기생의 딸 춘향과 남원 부사의 아들 몽룡이 신분을 초월한 사랑을 이룬 곳이니까 남원의 사랑 이야기는 꽤나 혁명적이기도 하다.
남원으로 간다. 온 세상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청춘의 빛으로 푸르른 신록의 계절이고, 모든 꽃이 피어나는 사랑의 계절이고, 5월은 뜨거운 혁명의 계절이니까 남원 여행이 그야말로 딱이다.
"러브가 무엇이오?"
“총 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
<미스터 선샤인>
<미스터 선샤인> 드라마에 빠져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대사의 일부다. 그 어렵고 위험하고 뜨거운 ‘러브’인 동시에 지독한 자기혐오로 생명을 갉아먹는 아픈 사랑의 절정을 보여주는 주인공 구동매를 위한 장소는 여기, 서도역이다.
극 중에 기차역은 유독 결정적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이고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지나가는 곳이었다. 그 촬영 장소가 남원의 옛 서도역이라기에 가보고 싶었다. 1934년에 준공되어 8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그것이 흙과 나무 시멘트로 만들어진 건물일지라도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드라마 촬영지라는 친절한 안내 조형물이 서 있는데도 서도역을 마주하는 순간 역사와 주변은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만 같다. 드라마에 몰입했던 사람이라 그런지 건물, 철로, 개방지를 마주하는 순간 마치 이 장면이 눈앞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오지 마. 오지마라 제발··· 오지 말라니까."
백정이 짐승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던 시대, 고개를 들어 사람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매질을 당하고 목숨을 잃었던 천민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 목숨을 구해준 양반집 딸 고애신을 평생 사랑하는 형벌을 받은 구동매는 내가 가장 가슴 아파한 캐릭터였다. 그가 기차역 선로 한가운데 꿇어앉아 고애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면서도 보고 싶어 그리운 마음으로 쏟아내는 애절한 대사다.
자기혐오와 독한 연모로 매일 매일 조금씩 자신을 벼려 마침내 죽어야 했던 시대의 사랑과 아픔을 지켜본 기차역으로 이제 인생샷을 남기려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봄바람 따스하고 파릇파릇한 초록 풀에 꽃이 가득 피어있어 향긋한 봄 내음이 가득할수록 텅 빈 역사는 서글프고 아름답다.
드라마 촬영지가 여행지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왔다 갔다는 인증샷 때문은 아니다. 이야기가 준 감동, 공감했던 어떤 순간을 그 장소가 생생하게 소환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폐쇄된 역사 안에서 오지도 가지도 않을 기차를 기다리고 상상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내도 좋다.
서도역은 일제 강점기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남원 지방의 몰락 양반가 3대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 <혼불>의 주요 배경지이기도 하다. 그 시대 양반과 서민들의 삶과 애환이 깊이 있게 그려졌고 특히 당시의 세시풍속, 관혼상제, 음식, 노래 등을 철저한 고증으로 살려 혼불을 쓴 최명희 작가의 혼불문학관은 서도역에서 차로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다.
춘향전과 광한루
광한루원을 처음 찾아갈 곳으로 정했다. 광한루원은 춘향이 그네를 타다가 몽룡을 만나고, 사랑을 나누기도 했던 누각이 있는 정원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해가 질 때에 맞춰 광한루를 찾아 로맨틱한 기분과 풍광을 즐겨볼 생각이었는데 광한루원은 성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오히려 뜨거운 피 흘린 혁명의 장소라고 해야 더 어울리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동학의 교조 수운 최재우 선생이 시천주, 인내천의 사상으로 혹세무민,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몰렸을 때 남원으로 피신해 은신처로 삼았던 곳이 광한루 오작교 주변이었다.
동학사상 경전을 집필하고 호남 지역 포교의 시초가 되는 장소인 셈이다. 그로부터 30년 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남원성을 빼앗긴 대부분의 농민군이 참살당한 곳도 바로 지금의 광한루원 정문과 잔디광장 사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1919년 만세운동 당시에는 광한루원 오작교 근처에서 수많은 남원 군민이 일제의 사격으로 죽고 다치고 희생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광한루원에서 연인들의 달콤한 밀회로 마냥 로맨틱한 느낌만 떠올려서는 섭섭한 이유다.
광한루원이 마냥 낭만적 사랑의 장소는 아니지만 진정으로 뜨거운 사랑의 성소라는 생각이다. 권력자가 강요하는 수청을 거부하며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를 연인을 향한 절개를 지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을 테니. 목숨을 건 여인의 사랑도 뜨겁지만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하늘과 같다는 인내천의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 역시, 목숨을 건 뜨거운 시대적 사랑이 아닌가.
5월 밤에 광한루원을 걷는 산책은 실로 아름답다. 광한루를 장식한 조명으로 야경은 꿈결 같아서 17세기의 춘향과 몽룡이 사랑을 나누던 밤을 상상하기도 좋다. 하늘에 휘영청 달이 밝고 별이 총총했을 그날 밤을 떠올리며 하릴없이 그네를 타보고 월매집에도 들어가 보자.
광한루는 세종 26년(서기 1444년) 정인지가 전설 속의 달나라 궁전(광한청허부)처럼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했다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다. '호남제일루'라는 자부심이 이름부터 명백하다. 광한루 오른편 반원형 석조다리 오작교는 선조 15년(서기 1582년) 조선의 시인 정철이 작명한 것이다. 견우와 직녀를 위한 다리를 다정하게 손잡고 연인샷을 남기는 커플도 꽤 눈에 띄었다. 연인이 손잡고 오작교를 걸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니 그 사랑 이루어지기를.
처음에는 남원이 대한민국 No.1 사랑의 고장이라고 하는 말에 '춘향전 하나 가지고 너무 우려먹는 것 아닌가' 했다. 하지만 따져보자. 목숨을 건 의리와 절개의 성춘향, 나라를 위해 환하고 뜨겁게 불꽃으로 살다 간 고애신, 부서지고 상처받아도 절대 사그라지지 않는 민족 혼불까지 다 남원인데 겨우 줄리엣 발코니를 앞세우는 베로나를 비할 것인가?
“러브가 무엇이오? "
“총 쏘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보다 더 위험하고, 그보다 더 뜨거워야 하오.”
어렵고 위험하고 뜨거워 위대한 사랑, 어떻게 다들 하고는 계시는지. 나들이를 마치며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