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기 더봄] 은퇴 후 필요한 세 가지 일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 먹고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 있는 일 한 가지가 부족하면 드라마틱한 삶 두 가지가 부족하면 비극적인 삶
나이 마흔이 되었을 때다.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엊그제 같은데 마흔이라니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마흔이라면 인생의 반환점에 이른 나이인데 과연 직장 생활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났다. 매체 보도를 보니 주된 직장에서 퇴직하는 나이가 오십이라고 한다. 일단 나이 오십에 퇴직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먼저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눈에 띄는 글을 발견했다. 19세기 폴란드 시인 노르비트가 쓴 글인데 그는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세 가지 일이 필요하다고 한다. 세 가지 일이라고? 그게 뭐지. 바로 먹고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이다.
그에 의하면 세 가지 중에서 한 가지가 부족하면 삶이 드라마틱해지고 두 가지가 부족하면 비극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의 일이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글의 요지다. 그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 가지 일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를 중심으로 은퇴 계획을 세웠다. 첫째 먹고사는 일이다. 돈이 많은 부자라고 해서 모두 행복할 수는 없지만 먹고살기가 어렵다면 그것도 행복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최소한 먹고사는 것이 해결되어야 한다.
둘째 목숨을 바칠 정도로 재미있는 일이다. 많은 사람이 은퇴 후에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물어보면 대개 없다고 한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우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한다.
셋째 의미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내심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자신도 이 땅에 흔적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먹고살기에 급급해 막연히 그 일을 뒤로 미룬다. 은퇴는 바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다.
직장 생활을 할 때 가까운 친구들과 가끔 책을 읽고 독후감을 나누었다. 언젠가 이들에게 은퇴하면 투자클럽을 하나 결성하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다들 좋다고 맞장구를 쳤다. 우리는 매월 격주간으로 두 번씩 모이기로 하고 몇 가지 원칙을 정했다.
주식이나 채권에 투자한다면 수익을 올리기보다 손실을 보지 않는 쪽에 더 비중을 두었다. 모두가 공감하면 투자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부정적이면 투자하지 않았다. 물론 이렇게 내린 결론이 늘 옳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새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적어도 편견에 빠져 그릇된 결정을 내린 적은 없었다.
이 모임은 지금도 하고 있다.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속담도 있지만 자주 만나다 보면 정도 두터워지기 마련이다. 은퇴 후 인연을 많이 정리했는데 투자클럽은 내가 참석하는 몇 개 안 되는 모임이다. 나는 투자클럽을 통해 먹고사는 일의 일부를 수행하고 있다.
퇴직할 무렵 이웃에 사는 성당 교우가 내가 학교 다닐 때 드럼을 친 것을 알고 몇 사람이 모여 밴드를 결성하자는 제의를 한다. 악기를 손에 놓은 지 오래되어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그의 제의에 응하고 음악학원에 등록하여 다시 드럼을 익혔다. 이미 기초는 다져있는 터라 두어 달 배우다 보니 예전의 감각을 되찾았다. 내친김에 콘트라베이스도 배웠다. 그때부터 동네 이웃들과 밴드를 결성하여 십여 년 이상 정기적으로 연주회를 개최했다.
우리 밴드의 연주는 조용히 감상하는 여타 음악회와는 달리 맥주를 한잔 걸치고 박수로 호응하며 때로는 춤을 추기도 한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지인이 음악회에 와본 후 우리나라에 이런 문화가 있는지 몰랐다고 하며 즐겨 참석했다. 동네 이웃과의 음악회를 통해 재미있는 일도 추구한 셈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비보를 접했다. 회원 한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그 후 팀을 해체했는데 그와의 추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그때가 그립다.
십여 년 전 매체 보도를 통해 영국에 제3기 인생학교 U3A(University of the 3rd Age)가 있는 것을 알았다. 노인이 돌아가시면 도서관 하나가 불탄다는 격언이 있다. 시니어들은 생을 살며 터득한 경험과 지식을 주위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 싶어 한다. 그러한 원리로 설립된 것이 바로 영국의 인생학교다.
나는 이런 학교가 우리나라에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012년 보건복지부가 주최하고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은퇴 후 8만 시간 디자인 에세이 공모전에 나의 생각을 요약하여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란 제목으로 응모했는데 시류에 맞는 주제인지 대상에 뽑혔다. 여기에 힘입어 2013년 분당에 아름다운인생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2020년에는 위례신도시에 위례인생학교를 추가로 설립했다.
인생학교가 분당과 위례에 설립된 후 여러 기관과 시민들이 찾아왔다. 앞으로 인생학교가 지역 곳곳에 세워질 것으로 전망한다. 최근 경기도 관계자와 산하 도시에 인생학교 설립을 모색하고 있다.
인생학교는 단순히 지식만 나누기보다 은퇴 후에 뭘 할지 모르는 이웃들에게 여러 가지 팁을 전해주고 친구가 되기도 한다. 통계청에 의하면 우리나라 노인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라고 하는데 인생학교가 전국으로 보급되면 자살률도 어느 정도 낮출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인생학교 설립은 내가 추구했던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다.
지금까지 노후에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일 세 가지 즉 먹고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 있는 일의 사례를 소개했다. 사람마다 가치관이나 관심사, 그리고 경제적 눈높이가 달라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딱히 정할 수는 없으나 노르비트가 권한 세 가지 일이 인생 2막을 살아가는데 해답은 줄 수 있다고 본다. 흔히 은퇴 준비라면 먹고사는 일에만 치우치기 쉬운데 세 가지 일이 균형을 이루도록 후반생을 잘 설계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