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사프란볼루 가는 길, 알라 알라 할머니 (2)
[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용변 본 후 국제미아 될 뻔 차도르 쓴 할머니들과 행군 말로는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전편에 이어서) 미세한 움직임도 대형 참사로 이어질 아슬아슬한 상황, 나는 괄약근을 조인 채로 뛰었다. 버스 위치를 확인한 후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하필이면 건물 맨 끝, 그것도 약간 구석진 곳에 화장실이 있었다. 너무 꼭 쥐어 손가락에서 잘 떨어지지도 않는 1리라 동전을 건네고(유럽 국가의 대부분이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 마침내 평화를 찾았다.
손을 씻고 물을 털며 건물 밖으로 나와서도 거기가 휴게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나와보니 내가 휴게소라고 생각했던 빌딩 앞 도로가 텅 비어 있었다. 버스가 사라졌다. 믿기지 않았지만 정말 버스가 사라지고 없다. 주유를 하고 있는 걸까? 제발 그러기를 바라며 주유소를 찾아 뛰었다.
널찍한 공터에 버스는 없었다. 꿈이기를 바라며 습관처럼 주머니로 손을 넣어보았다. 휴대폰도 없다. 급히 튀어나오느라 화장실 요금 말고는 챙긴 것이 없었다. 지갑과 여권은 얌전하게 선반에 놓인 가방 속에, 그리고 휴대폰은 태블릿, 책과 함께 앞자리 그물에 담겨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튀르키예 말은 ‘화장실이 어디입니까’ ‘버스정류장이 어디입니까’ 정도다.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터키말을 하지 못합니다’ 같은 말이 지금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나는 길을 잃었습니다’ ‘버스를 놓쳤습니다’ 와 같은 말을 외워뒀어야 했다. 한 마디도 못하는 상태로 신분증도 전화기도 없이, 터키 중부의 어딘지 모를 시골 마을에 팽개쳐지다니.
그제야 대한민국 외교부에서 매일 보내던 문자가 떠올랐다. <터키 동부는 IS 출몰이 잦은 여행 위험지역입니다. 타 지역으로의 여행을 자제하시고 사고 시에는 외교부로 연락 바랍니다. 전화 번호 0000>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전화번호가 기억날 리도 없지만 아니 사고시에 전화를 하라니! 전화만 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사고 축에나 들겠나. 용변을 보고 나와 국제미아 신세라니.
국제미아 신세임을 자각한 후에도 난 차분하게 행동했다. 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히 아니다. 난동을 피운 것은 아니지만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내 행동은 매우 신비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무작정 다가가 영어와 한국말을 섞어 도움을 청했지만 사람들은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약간 울먹이며 튀르키예 말로 외쳤다. “나는 터키어를 하지 못합니다.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쁜 방법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시라. 이방인이 분명한 행색을 한 여자가 대한민국 시골에 나타난다고 치자. 지나가는 사람마다 붙잡고 영어와 자기나라 말을 외치며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나눈 한쿡마룰 하지모남미다. 나눈 뛸키쉬 사라밈다”를 중얼대면, 일단 정상이 아니란 것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한심해도 비정상 외국인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에는 괜찮은 방법이었다.
나는 다가가고 사람들은 뒷걸음질하는 애매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고저쩌고 알라아~ 알라아~”
니캅 차도르를 입은 할머니들이 일제히 두 팔을 들어 올렸다가 내리고 다시 손으로 이마를 치며 알라를 부르고 있었다. 자리를 맴돌며 팔을 휘젓는 여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바로 그 할머니였다. 이스탄불 터미널부터 버스 옆자리에서까지 내내 나를 괴롭게 한 바로 그분. 살면서 누가 그렇게 반가웠던 적이 있던가? 그날 그 순간처럼 어떤 사람을 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의 그림자가 걷힘을 절감했던 적은 없다.
“할머니이이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할머니를 부르며 달려갔다. 어떻게든 되겠구나, 하는 안도와 반가움에 하이톤 콧소리까지 섞였다. 할머니를 부르며 이번에는 내가 할머니의 옷 소매를 붙들고 매달렸다.
“알라 알라 알라아아”를 외치는 할머니들과 내가 있는 쪽으로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벽돌만한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무전기 남자는 할머니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할머니들은 그에게 소리를 질렀다. 무전기 남자가 나를 가르키며 뭐라고 묻는 눈치였다. 우리 할머니(앗~ 내가 지금 우리 할머니라고 했나?)는 내 팔을 바싹 당겨 당신 쪽으로 끌면서 남자에게 말했다. "어쩌고저쩌고 알라아~ 알라아~"
머리카락이 먹종이처럼 지글거리던 여름날, 나는 할머니들 틈에 끼어 터키 고속도로를 행군했다. 거리가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겠다. 흰 와이셔츠가 무전 후 할머니들에게 무어라고 설명했다. 할머니들은 예의 그 어쩌고저쩌고 알라 소리 지르기를 몇 번 반복하더니 걷기 시작했고 나는 무작정 할머니들을 따라갔다. 버스로 가는 거구나, 차를 돌릴 상황이 아니구나 하고 짐작했을 뿐이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고속도로 갓길을 따라 니캅 차도르를 쓴 여인들 뒤로 민소매 원피스를 입은 한국 여자가 한 줄로 걸었다. 할머니의 차도르 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깃발처럼 펄럭이며 내가 안전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자동차가 지날 때마다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며 얼마나 걸었던가? 비상등을 켠 버스가 보였다.
버스 밖에 사람들이 나와 있다.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펄쩍펄쩍 뛰는 것도 같다. 현대무용으로 분노 혹은 어이없음을 표현한다면 저런 몸짓이 아닐까 생각했다. 우리가 버스에 오르자 어떤 남자는 손가락으로 손목시계를 치며 삿대질을 했다. 몇몇은 웃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큰소리로 알라를 찾았다. 내게는 단체 고함지르기 대회처럼 보였다.
급기야 우리 할머니도 차장에게 삿대질과 함께 따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침에는 버스 차장이 튀르키예 영화의 주인공처럼 잘생긴 미남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멍청이로만 보였다. 그는 중요한 임무를 잊었다. 승객에게 머핀과 오렌지 주스를 나눠주는 일 외에 승객의 종착지를 확인하는 기본적인 일 말이다.
중간 승객을 태우려 세운 임시 기착지를 휴게소로 착각하고 내린 나의 잘못도 있지만 엄밀히는 차장의 부주의 혹은 업무불이행으로 벌어진 헤프닝이 아닌가. 버스 안 삿대질과 고함 지르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내게 그건 노래 같기도 했다. 조금 시끄러운 뮤지컬 제목은 ‘어쩌고저쩌고 알라아~ 알라아' 라고 해두자. 다 괜찮다. 국제미아 신세를 면했다.
끓어오르는 고속도로를 걷고 버스에서 따가운 눈총을 먹은 후 내 뇌의 화학식이 좀 달라진 것일까? 난 할머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내 이름을 알고 싶었고, 내가 결혼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터키가 맘에 드는지, 사프란볼루에는 왜 가는지 궁금해한다는 것을 기적처럼 다 알아들었다. 할머니는 여전히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똑같이 ‘어쩌구 저쩌구 알라아~ 알라아~’했지만 말이다.
나는 휴대폰 사진 폴더를 열어 보여 드리고 몇 시간 전 할머니의 손을 떼어내던 손으로 태블릿을 만져보도록 손을 잡아드리고,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여정을 기록했던 노트를 펼쳐 할머니가 알아볼 수 있게 그림을 그렸다.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할머니의 이름은 하디자, 아들 다섯과 딸을 하나 두셨다. 사프란볼루에서 가까운 카라뷔크 마을에 산다. 이스탄불 오토갈에서 할머니를 배웅했던 청년은 할머니의 큰손자다. 이건 기적이 아닌가! 내가 이 모든 것을 알아들었으니까.
“데세큘예데림(감사합니다)” 이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우리말로 “죄송했어요”를 수없이 반복했다. 내 옆자리에 앉아줘서, 엉뚱한 터미널에서 내려줘서, 목소리가 커서, 나를 알아봐 줘서, 나 대신 차장에게 항의해 줘서 모든 것이 감사했다. 모든 것이 죄송하기도 했다. 매몰차게 굴어서,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말로 독하고 매정하게 말해서, 신경질적으로 외면해서, 그래서 죄송했다.
사프란볼루를 앞두고 할머니가 내려야 할 마을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며 하디자 할머니는 손바닥을 펴서 가슴에 대고 말씀하셨다.
“어쩌고저쩌고 알라~ 알라아~”
이제 난 할머니의 말을 아주 잘 알아듣는다.
“잘 가. 여행하는 동안 무사하도록 알라신께서 도와주실 거야.”
“고맙습니다. 할머니, 건강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자꾸 목젖이 떨려왔지만 웃으며 큰소리로 인사를 드리는 순간 버스가 출발했다. 말로는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말로는 전할 수 없는 말, 마음은 힘이 세고,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사프란볼루 가는 길에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