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옥 더봄] 망한 부잣집 딸 패션이라고?
[홍미옥의 일상다반사] 잊고 있던 낡고 오래된 물건들 나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추억의 일부분이자 소중한 유물
'꼭 망한 부잣집 딸 패션 같아.'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와 화제가 된 말이다. 요샌 유행어가 하도 빠르게 지나가는지라 이건 또 무슨 말일까 궁금했다.
망한 부잣집 딸의 구닥다리 패션은?
내용인즉슨 이렇다. 어느 유저가 옷장을 정리하다 오래전에 유행했던 소위 3초백이라 불렸던 가방을 발견했다. 하지만 유행이 한참 지난 듯해서 이걸 들고 나가도 될까 하는 고민 글을 게시했다.
우후죽순으로 달린 댓글은 이렇다. 까짓거 유행이 별거냐 그냥 들어라, 요즘은 촌스럽게 그런 가방 안 드는 추세다, 그런 게 바로 유물이다 등등 다양한 댓글이 올라왔다.
그중의 백미는? 꼭 예전에 잘나가다 망해버린 부잣집 딸 패션을 연상시킨다는 거였다. 값비싸게 산 물건이 구닥다리가 되도록 버리지 못하는 심정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과거의 풍요로움을 못 잊는 것이라고.
그렇다고 망한 부잣집 딸이라니···. 너무했다. 꼭 값비싸게 산 물건은 아니라도 누구에게나 오래된 나름의 유물은 있기 마련이다. 이 기회에 나도 옷장 좀 뒤집어 볼까?
대청소 중 발견된 유물의 정체는?
아! 평소에도 이렇게 청소하면 좋으련만···. 구석구석 치워대는 대청소는 맘처럼 쉽지는 않다. 그래도 가끔은 주부 본능이 살아나서 부지런을 떨곤 한다.
무슨 옷이 이리도 많은지, 하지만 그중에는 작아서 못 입는 옷이 수두룩했다. 언젠가는 살을 빼 입고야 말 거라는 야무진 다짐은 몇십 년째 다짐으로만 이어오고 있었다.
옷장 뒤쪽 빈 곳에 낯선 스커트가 보였다. 몇 년을 그곳에 주저앉아 있었는지 모를 그것을 꺼내 보았다. 옷감은 긴 시간 눌려 있어 주름이 지고 색은 바래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내게 이런 옷이 있었던가?
생각났다. 계산하기도 벅찬 몇십 년 전, 정확히는 1989년 여름이었다. 엄마와 난생처음 떠난 유럽 여행에서 구입한 옷이다. 지금의 나보다 더 젊었던 엄마가 딸인 내게 사주었던 옷이다. 철이 없던 난 한눈에도 작아 보이는 스커트를 사달라며 엄마를 졸랐었다. 엄마는 한눈에도 맞지 않는 옷을 사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딸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결국 살을 빼서 입으면 될 거라며 평생 지키지도 못할 약속까지 하며 옷을 샀다. 보나 마나 그 공약(?)은 물 건너갔고 마젠타색이 고왔던 주름스커트는 본의 아니게 옷장 지킴이 노릇을 했던 거였다.
계산을 해보니 34년이나 지난 옷인 셈이다. 이 정도면 내겐 망한 부잣집 어쩌고 대신 소중한 유물이다.
옷장 지킴이가 되어버린 주름스커트
색도 바래고 탄탄하던 주름도 뭉개져 버린 스커트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젊었던 엄마는 구순의 노인이 되어 누구의 부축이 없이는 외출도 어려울 지경이다.
그런가 하면 주제(?)도 모르고 작은 사이즈의 옷을 기어코 얻어냈던 딸은 하루가 다르게 눈도 침침하고 관절이 쑤시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이뻐 보였던 스커트는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한 채로 색바랜 헌 옷이 되어 있었다.
결혼 전 주니어용 옷장을 거쳐 신혼 초의 단단한 원목 옷장으로 그리고 매끈한 하이그로시 옷장을 거쳐 작은방의 행거까지 나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다.
하지만 낡은 이 스커트는 망한 부잣집 딸 패션이 아니라 나의 역사가 고스란히 묻어있는 추억의 일부다. 또한 소중한 유물이기도 하다. 다만 아직도 사이즈가 한참이나 작은 이유로 당분간은 눈으로만 두고 봐야 할 듯싶었다.
내친김에 동네 수선집에 갔다. 너무너무 다행스럽게도 수선이 가능하단다. 최대한 늘리면 내 몸이 들어갈지도 모르겠다. 모직 스커트니 올가을부터는 부지런히 입고 다녀야겠다. 엄마와 나의 옛이야기가 스민 그 옷을!
베란다 창고에도 유물이?
집안의 유물 이야기가 나왔으니 베란다 창고를 뒤집은 이야기도 해야겠다. 그곳은 이사할 때를 제외하곤 당최 들여다볼 일이 없는 곳이다. 뜯어보기도 겁나는 상자들이 먼지를 켜켜이 안고 있는 거기에 유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냥 버리기는 아까운 책을 넣어둔 상자라고 알고 있었는데 왠지 열어보고 싶었다.
아뿔싸! 그 안에서 나온 건 놀랍게도 조리 도구였다. 채 비닐이 뜯기지도 않은 스테인리스 3종 세트다. 3중 바닥이 어떻고 하면서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던 브랜드의 로고가 선명하다.
친정엄마가 혼수로 장만해주신 냄비 세트는 놀랍게도 아직 반짝거리며 시간 따위는 잊은 것 같았다. 가뜩이나 요리 솜씨도 어설펐을 신혼의 딸을 위해 친정엄마가 세심하게 고른 그릇이리라. 나의 무심함과 속절없이 흘러가 버린 시간, 친정엄마의 마음까지 어우러져 하마터면 울 뻔했다.
아무튼 베란다 창고에서 발견한 냄비 세트도 나의 유물인 셈이다. 스치는 바람과 냄새에서도 옛 추억을 떠올리곤 하던 나이가 되고 보니 오래된 물건에서도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나 보다.
이쯤에서 우리 애정하는 독자들의 추억이 담긴 유물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