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꽃바람 불면 수상한 절집, 망해사

[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수평선과 지평선이 만나는 밀회의 정원 사라진 바다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모두를 잃고 모두를 잊고 봄날은 간다

2023-03-16     박재희 작가·모모인컴퍼니 대표

느닷없이 봄은 오리라. 살금살금 봄 향기가 퍼질 때면 어김없이 꽃을 샘하는 바람이 불겠고, 꽃샘을 따라 봄은 화들짝 피어난다. 꽃봉우리 터지는 소리로 소란스러운 봄날, 마음을 툭 치는 바람이 불 것이다. 봄바람 불고 꽃바람 나면 세상은 한꺼번에 깨어나 만나고 속닥거리며 눈부시다.

찬란한 봄의 전령 꽃 /게티이미지뱅크

계절이 지난 외투를 벗는 것 말고 봄을 맞을 준비도 없이 막막했던 어느 해 봄날 나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를 데리고 떠나고 싶었다. 망해사를 떠올렸던 것은 오래되고 아득한 기억 속 시 한 구절 때문이었을 게다. ‘문을 열면, 모두를 잃겠네’ 윤선도가 망해사에서 남긴 노래였다.

‘문을 열면, 모두를 잃겠네 / 주인은 목탁을 잃고 / 석가모니는 중생을 잃고 / 나는 나를 잃고 / 바다의 품으로 모두 돌아오네’

조선의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모두 잃어버리고, 모두 잊어버리고 온전히 홀로 남은 절집에서 하염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싶었다. 급해진 마음을 챙겨 망해사로 향했다.

찬란한 봄 후두두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땅은 끝도 없이 몸을 늘이고 펼쳐져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들어서면 길 위의 봄은 만져질 듯 가까워진다. 금만로를 따라서 만경강을 건너고 읍내를 지나자 가슴이 쿵 하고 떨어졌다. 기습적으로 시야를 점령한 풍경은 평원, 만경평야였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이곳에서 나는 드넓어 끝이 없는 땅을 바라보았다. 말 그대로 ‘눈이 모자라 다 못 보겠다’고 했던 광활함이다.

만경평야.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 /사진=박재희

벌판이 바다라면 벌판 바다와 해가 넘는 서쪽 바다의 경계에 야트막하게 솟아나 있는 봉우리가 있다. 해발 72m의 야트막한 언덕이지만 진봉산이라 불린다. 진봉산을 서울 남산 옆에 세우면 봉우리는 겨우 남산의 무릎이나 넘길까 말까 할 텐데도 말이다.

낮은 키에도 산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 생김 때문이라고 한다. 산이 봉황을 품은 형상이라니, 하긴 봉황을 품었다면 높이가 대수일까? 사람이나 산이나 크기보다는 알맹이로 이름을 얻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러니 진봉은 산 맞다.

진봉산을 오르는 길이 망해사로 이어진다. 1300년 오래된 사찰로 가는 길이건만 입구에는 소박한 푯말만 하나 서 있다. 굳이 사람을 부르고 싶지 않다는 듯 변변한 안내문 하나 없는 언덕길인데 양옆으로 수백 년 그 길을 지킨 듯한 소나무들이 줄지어 늘어 서 있었다. 아름드리 우아한 소나무가 하늘까지 큰 키로 자라있다.

시끄러울 것도 없는 길가로부터 멀어질수록 고요함이 더 깊어졌다. 품위 있는 소나무가 지키는 막막한 고요 속에서 팽팽하던 적막함을 깨고 나타난 것은 흐드러진 개나리와 벚꽃이었다. 어이없는 봄의 환호가 넘치는 춘정으로 밀회 중이었다.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는 절집 망해사로 가는 길, 이름처럼 바라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설렘으로 걸었다. 꿈꾸듯 취한 듯 걸었는데 길이 끝나기도 전, 불쑥 절집 마당이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망해사는 애초부터 수상한 절집이었다. 일주문이나 사천왕사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정원이다. 불당이 보이질 않는다. 사찰 한가운데 성정을 가눌 길 없다는 듯 분홍 벚나무가 흐드러져 온 마당을 다 덮고 있다. 절집에 배롱나무도 아닌 벚나무가 떡하니 중심을 차지하고 서서 20m 넘게 자란 팽나무 둘을 거느리고 있다. 마치 어여쁜 여인 옆에서 두 남정네가 홀림을 당하고 뻘쭘하게 서 있는 모양새랄까.

망해사는 사찰이라기보다 비밀연애를 위한 정원처럼 고혹적이다. 목탁 소리가 아니라 파도 소리를 듣겠다는 이름을 붙인 청조헌에 걸터앉아 바다를, 이제 호수가 되어버린 바다를 바라보았다. 윤선도의 노래가 다시 떠오른다.

‘주인은 목탁을 잃고, 석가모니는 중생을 잃고, 나는 나를 잃고, 바다의 품으로 모두 돌아오네’

망해사 절집 마당의 벚나무 /사진=박재희

서해 낙조를 즐기기 위한 낙서전은 아예 절집 마당을 외면하고 뚝 떨어져 있다. 그나마 불교식 이름을 붙인 극락전이 있지만 벚나무에 사찰의 중심을 내어주고 몸을 피해 있다. 기분 좋은 파격의 이 수상한 절집에는 부처도 아니고 목탁 소리도 경전도 아닌 매혹이 가득 차 있다.

백제 의자왕 2년(서기 642년) 사찰이 세워졌던 자리에 1000년 후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짓고 망해사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바다 말고는 모두를 버리게 되는 곳, 망해사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림으로써 무위의 해방과 기쁨을 찾게 해줬을 것이다. 새만금 방조 사업으로 호수가 되어버린 그 바다를 이제는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사라진 망망 바다의 거친 파도 소리가 들린다.

지평선과 수평선이 만나는 유일한 곳, 외진 서쪽 바다 절벽에 기댄 절간에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모두 잊고, 모두 잃어버리고, 꽃 바람 부는 봄날이 오면 나는 망해사에 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