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 더봄]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없다
[손민원의 성과 인권] "당신 같은 사람의 말을 누가 들어줄 것 같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여성의 참정권 투쟁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
‘서프러제트’의 의미는 여성 투표권을 주장하며 거리에서 투쟁하는 사람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영화『서프러제트』는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인『싸우는 여자가 이긴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우리는 모두 존엄하고 평등한 사람입니다. 누구나 공감하는 말이지만 불과 100년여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은 특정한 사람뿐이었습니다. 참정권이 처음부터 모두에게 주어지는 당연한 권리였을까요? 평등한 투표권이 보장되기까지 역사 속에 수많은 투쟁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투쟁 중의 하나인 여성의 참정권을 다룬 영화『서프러제트』에서 인권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초기의 참정권은 귀족이나 상류층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1912년 영국 런던입니다. 18~19세기가 되면서 점차 중산층과 노동자들에게도 참정권이 확대됐으나 여성에게는 자신의 의사를 표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1900년대의 여성에게는 참정권도, 자녀에 대한 법적 권한도 없었습니다.
영국의 여성사회정치연합 활동가들은 몇십 년에 걸쳐 정부와 의회에 여성의 참정권을 합법적으로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가 끝내 거절되자 활동가들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투쟁합니다. 진열장의 유리창을 부수고 세급 납부를 거부하며 정치인의 집에 불을 지르는 행동도 서슴지 않습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우리는 무법자가 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입법자가 되길 원한다(We won't be law breakers, We want to be law makers).”
주인공 ‘모드 와츠’는 평범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 세탁 공장의 여공으로 살아갑니다. 그곳에는 쉬는 시간 없는 노동, 성추행 등 인권 유린이 자연스러웠지요. 남녀가 똑같이 공장에서 일해도 여자라는 이유로 임금은 훨씬 작았고, 해고의 위험 때문에 신고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날 모드는 길거리에서 유리창에 돌을 던지며 격렬한 참정권 운동을 하는 여성들을 보지만 별 관심 없이 피해 다닙니다. 그런데 우연히 팽크허스트의 연설을 듣고 비로소 여성이 처한 처참한 현실에 조금씩 눈을 뜨게 돼 서프러제트의 일원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여자는 정치에서 판단력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감정적이고 쉽게 냉정을 잃습니다. 만약 여자들에게 투표할 권리를 준다면 사회 구조가 무너질 겁니다. 여자의 권리는 아버지나 형제, 남편을 통해 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자들에게 투표권을 주면 국회의원, 국무위원, 판사까지 되겠다고 주장할 겁니다.”-영화 속 국회의원 연설문 내용
모드 와치는 서프러제트 활동을 시작하면서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자 남편은 이를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아이를 돌보고 아내의 역할로만 존재할 것, 아내와 엄마, ‘집 안의 천사’ 이것이 모드의 본분인데 그것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녀는 집에서 쫓겨나고 아들조차 만날 수 없게 됩니다.
“법이 아들을 못 보게 한다면 법을 바꾸기 위해 싸우겠어요”라고 말하며 아들을 빼앗아 가는 법에 대항합니다. “우린 범법자가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우린 입법자가 되고 싶은 겁니다.” 서프러제트에 참여한 여성들은‘여성에 대한 법 제정이 없으면 우리는 항상 이렇게 살아야 하는구나!’를 깨닫고 그것을 고쳐 나가기 위해 투쟁합니다.
에멀린 팽크퍼스트는 연설합니다.
일방적으로 쓰인 법은 폭력적이다. 누군가는 동의한 적이 없는 법에 의해 심판되고 억압받는다. 남성은 그들이 만든 질서 위에서 표현을 장악하고 인간에 대한 권리를 독점한다. 이 질서 속에서 여성은 발언권이 없는 소유물, 혹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권리 주장이 철저히 외면되는 현실에서 에밀리와 모드는 국왕이 참가하는 엡손 더비 경마대회에 갑니다. 에밀리는 달리는 말에게 뛰어들어 과감히 자신의 목숨을 던지고, 그 장면을 수많은 카메라는 담아냅니다. 그렇게 에밀리의 희생이 있은 후에야 많은 사람은 여성의 투표권에 주목하게 됩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는 모드, 에밀리와 같이 희생을 감내했습니다. 그들에 의해 역사는 바뀌고 전진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내 권리가 있습니다. 영화는 19세기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주 내용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볼까요? 여성과 남성의 문제를 넘어 나이, 국적, 빈부, 피부색, 직업, 돈이 많고 적음을 적용한다면 여전히 투쟁하고 행동할 것투성이입니다.
이 영화의 앤드 크레딧에는 여러 국가가 참정권이 허용된 연도를 보여줍니다. 1893년에 뉴질랜드를 시작으로 1920년 미국, 1928년 영국, 1946년 프랑스 여성들이 참정권을 갖게 됐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스위스는 1971년에서야 여성참정권을 인정하게 됐고 2005년에 쿠웨이트, 2015년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성참정권을 인정했습니다. 한국의 여성 참정권은 3·1 운동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1948년), 대한민국 제헌국회에서 여성의 참정권이 제도로 보장됐습니다.
참정권을 갖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일 겁니다. 그것은 국민의 한 사람인 주권자로, 동등한 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정권이 없다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거나 대표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청소년의 참정권을 살펴볼까요? 청소년들의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주장이 30여 년 동안 이어져 왔고, 드디어 2019년 12월에 18세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습니다. 선거권 연령 하향에 반대하는 정당과 여론은 ‘청소년은 공부가 우선이다.’ ‘판단력이 부족한 청소년을 정치화할 수 없다’며 청소년 참정권 부여를 반대했었습니다.
‘여성은 감정적이라서 투표권을 줄 수 없으니 집에 가라.’ ‘정치 참여는 어른들에게 맡기고 공부나 열심해 해라.’ 이 말들은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참여권을 갖기 위해 어떤 자격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 자격의 조건(여성, 18세 나이)은 합당한가요? 참고로 오스트리아는 16세에 투표를 시작하고 있고,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하는 것을 자율적 선택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신 같은 여자 말을 누가 들어줄 것 같소? 당신은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요.”
그러나 이 세상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는 없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똑같은 고통이 계속되리라는 것’은 당장 나의 삶이 변하지 않는다 해도 목소리를 높이고 투쟁할 수 있는 원동력일 것입니다.
편견이라는 안경을 쓰면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치우치게 보고, 차별을 하게 되고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세상으로 만들어 갑니다. 나는 어떤 편견의 안경을 쓰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