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준 더봄] 정월 대보름, 다시 시작하는 패자부활의 축복

[최익준의 낭만밖엔 난 몰라] 양력 2월에 뜨는 음력 정월 대보름의 달은 '작심삼일' 새해 결심을 대부분 잊어버려도 다시 새롭게 시작할 꿈과 결기를 제공한다

2025-02-17     최익준 박사·산업정책연구원 교수/(주)라온비젼 경영회장
아득하고 두렵고 불안한 미래에 '나는 무엇을 해야 제대로 기쁠 것인가?' 질문 하나가 스무 살의 나를 온통 지배했습니다. 수백 개의 두려움과 고통보다 내가 정하고 내가 원하는 길을 찾아갈 탐험이 기쁨의 정월 보름달처럼 두둥실 커 보였습니다. /사진=최익준

미래로 가는 인생 열차로 나보다 먼저 탑승한 사람들이 앞서 나갈 때 시류에 합류하지 않고 '뒤늦게' 이 길이 과연 내가 가야 할 길일까? 질문하며 고집스레 탐색한 소수의 사람이 있었지요. 저도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고독한 방황도 좀 하다가 뒤늦게 겨우 길을 찾아낸 부류의 한 사람이랍니다.

대학입시 고사장으로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 나와 홀연히 완행열차를 타고 지리산 천왕봉의 태양을 찾아 올라간 것이 내 뒤늦음의 시작이었습니다.

입시를 치르던 날 칼바람 불고 동트기 전 새벽의 순간을 흑백사진처럼 기억합니다. 합격을 기원하는 붉은 글씨에 하얀색 바탕의 플래카드가 초겨울 바람에 펄럭이던 고사장으로 가던 걸음을 멈추었지요. "저 시험장에서 받아낸 점수에 맞춰 내 한 번뿐인 인생 마차에 올라타는 것이 옳은가?" 인생 질문이 생겼었지요.

서슬 퍼런 그 시절,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길에 길들어져 마냥 따라가는 것도 다 싫었지요. 친구들과 함께 고사장으로 들어서는 길이 행복하지 않았지만 입시장을 포기하고 지리산으로 향한 길은 마치 불가능한 달을 찾아가는 길처럼 까마득하고 하얗게 길었지요. 시험을 치른들 그 목적지가 내가 갈 곳이 아니란 결심을 친구들은 쓸데없는 엉터리 돈키호테의 고집이라 했고 나도 그런 것 같다 웃으며 대답하고 떠났지요. 

날카로운 칼바람이 '쒸이~ 쒸이익~' 도려내듯 귓불을 때린 지리산 노고단 계단을 한 발 한 발 오르며 뜨거운 숨소리 따라 나온 입김이 안경렌즈를 하얗게 가리던 감각은 여전히 내 영혼의 그림 한 장으로 가슴속 문신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아득하고 두렵고 불안한 미래에 '나는 무엇을 해야 제대로 기쁠 것인가?'

질문 하나가 스무 살 전후의 나를 온통 지배했습니다. 미래의 두려움과 불안정한 고통들보다 내가 정하고 내가 원하는 길을 찾아갈 탐험이 기쁨의 정월 보름달처럼 두둥실 커 보였습니다.

문학반 친구들과 읽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남다른 삐딱선을 타도록 날 부추겼는지도 모릅니다. 지리산에서 읽은 그의 <수레바퀴 아래서> 문장들은 '내가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갈 주인공이 될 것인가?' 아니면 '내가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마부가 될 것인가?'의 질문으로 스무 살 시퍼런 청년으로 하여금 불면의 밤들을 보내게 했습니다.

시류를 따라 취직 잘 되는 공과대학으로 가는 것은 저에겐 주어진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것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신춘문예 작가로 등단하여 등단의 소감을 쓰는 것은 주체적 수레바퀴의 주인으로 사는 자유의 길이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꿈의 수레바퀴를 움직이기엔 외로운 가시밭길로 들어서야 하는 고단함이 기다리고 있었지요. 

구만리 같은 인생 수레바퀴를 굴리는 고집쟁이 마부의 길로 들어서서 낮에는 노동조합 없는 컨테이너회사 수출공장의 자재과에서 일하고 밤부터 새벽까지 전등불 켜고 내가 원하는 곳으로 건너기 위한 입시 대장정으로 들어갔지요. 

새벽을 넘어가는 밤마다 창밖의 우주에는 수십억 개의 별이 빛나고 낮에는 붉은 태양이 끓었으며 어스름한 새벽과 저녁 하늘엔 외롭지만 따스한 달이 신비롭게 떠다니고 있었습니다.

다수의 친구가 대학 캠퍼스의 낭만적 현실에 적응할 때 나의 현실은 직장이었으며 나의 잠 없는 밤은 꿈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공부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나가 보니 그 시간들은 뜨거운 열정과 두려운 미래가 벌이는 한바탕 전쟁터이자 꿈꾸는 시간이었으며 험한 세상에 사다리를 타고 오른 시간이었습니다.

은하수 가득한 우주의 꿈보다 일상에 맞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태양력에 일정을 맞춘 양력의 시간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지혜로운 선조들 덕분에 우리는 달이 뜨고 지는 시간을 따라 음력의 시간을 익히 활용하고 있지요!

정월 대보름 달을 패자부활전의 달이라 부르곤 합니다. 주어진 길을 성실하게 마냥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길을 걷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정녕 하고 싶지 않은지, 나 자신의 강점이 그 길에 잘 맞는지 아닌지, 어떤 길을 누구와 함께 걸어갈지···좀 늦더라도 깊이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내 지난 시간들이 증명한 셈입니다. /사진=최익준

대부분의 사람이 태양력의 시간을 따라갈 때 어떤 사람들은 태양력보다 늦게 뜨는 달의 시간, 즉 음력에 생일과 기념일들을 기억하며 살아갑니다. 정월 대보름 달은 태양력이 가져다주지 않는 입춘대길과 새봄의 서막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달이 세상을 비추는 달밤을 무척 좋아합니다. 음력 1월 정월 보름달과 음력 8월의 추석 보름달을 사무치게 좋아합니다. 저 보름달에는 나를 사랑한 할머님과 어머니 그리고 내 스무 살쯤 입시장에서 빠져나와 뒤늦게 다른 길을 떠난 내 꿈들이 어우러진 깊고 찬란한 청춘의 무늬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새해 떠오른 첫 태양을 기다리며 새로운 것들을 감행하자고 결심하지만 작심삼일 혹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마는 것이 다반사 아닌가요? 실은 저도 평생 새해에 결심한 대부분을 잊거나 포기한 채 1월을 보내곤 했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력 2월에 뜨는 음력 정월의 보름달은 다시 새롭게 시작할 꿈과 결기를 제공하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요? 저는 저 보름달을 패자부활전의 달이라 부르곤 합니다. 주어진 길을 성실하게 마냥 따라가는 것도 좋지만 새로운 길을 걷기 전에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정녕 하고 싶지 않은지, 나의 강점이 지금의 길에 잘 맞는지 아닌지, 어떤 길을 누구와 함께 어디로 걸어갈지··· 좀 늦더라도 깊이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도 나쁘지 않음을 내 지난 시간들이 증명한 셈입니다.

비록 이 믿음이 잘못된 편견이거나 착각이라 할지라도 말이지요. 패자부활전의 달을 보며 내가 미리 선택하여 실패한 것들에 대하여 뼈저리게 후회한 것들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실패와 포기 후에 다시 시작하면 다시 시작할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양력의 새해가 있고 음력의 새해가 다르게 있듯이, 다수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뒤늦어도 독립적인 나의 목적을 찾아 고집스레 가는 길은 결코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월 대보름 달은 당신과 나의 패자부활전 시작을 알려 주니까 말이지요.

달의 시간 음력 새해는 양력의 새해에 챙기지 못한 내 영혼의 결심도 챙겨보라는 뜻이 아닐까요?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이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다가 가끔 뒤돌아보는 이유는 내 영혼이 나를 따라오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 영혼의 시간이 정월 대보름이 아닐까요?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가? 어디로 가고 있으며 목적지는 어디인가?··· 새벽별 바라보며 질문하며 걷고 또 걷고··· 달이 높이금 솟아 비추어주는 길을 따라 걷습니다. 그러면 지리산 천왕봉을 찾아 떠난 그때 그 아름다운 청년이 가만히 내 가슴에 들어옵니다. 나는 여전히 그 꿈의 길을 걷다가 나를 사랑한 내 할머님이 계신 정월 보름달로 돌아갈 겁니다.

참, 저는 여전히 신춘문예에 등단한 작가는 못 되었지만 내가 동경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를 만나 동류로서 기뻐할 수도 있으며 이렇게 문장을 읽어 주는 독자님도 있으니 기쁘게 만족합니다··· 그때 그 시절 대학 입시장을 빠져나오길 참 잘했습니다.

'뒤늦은' 길은 뒤늦은 인생이 아니랍니다. 늦었지만 꿈의 길로 걸어가는 독자님께 정월 대보름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