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내가 너의 부적이 되어 주리다
[송미옥의 살다보면2] 모든 일은 생각하기에 따라 기쁨도 되고 슬픔도 된다
걷기운동 코스인 동네 어귀 굿당엔 이른 아침부터 주차할 곳이 없을 만큼 문전성시다. 새해 부적을 사러 온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가끔은 아침부터 신년 굿도 한다.
다리를 쭉 뻗은 새끼돼지는 색동이불을 살짝 걸치고 엎드려 입에 지폐를 물고 웃고 있다. 북과 장구, 멀리까지 울려 퍼지는 꽹과리 소리는 잠자는 산천초목을 일어나게 하고 유령을 호출하고 호령하며 우렁차다. 그러다가 어루만지며 잠재우듯 평온하게 리듬을 탄다.
올해도 나쁜 귀신은 얼씬도 못 하겠다. 열정이 넘친다. 그것이 미신이든 풍습이든 누군가의 마음에 힘이 되고 위안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신바람 나는 난타 소리에 잠시 멈춰서 구경을 한다. 모든 행위가 문화가 되어 신비스럽다. 입구에 길게 매달아 놓은 빨간색 바탕의 부적 천이 바람에 휘날렸다.
며칠 전 일이 생각난다. 연휴가 지나고 지인을 만나기로 한 딸네 아파트 옆 재활용 쓰레기장에서 방금 버린 듯한 비닐봉지에 장지갑 하나가 반짝거렸다. 꺼내어 보니 라벨도 붙어 있는 고급 지갑이다. 지갑을 열어보니 노랑 종이에 빨간색으로 이상한 모양이 그려져 있는 부적도 곱게 들어있다.
아마도 명절날 받은 선물인 듯하다. 갖고 있기 싫은 거라면 보기 싫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 아닌가. 아마도 ‘ㅅ’ 자 돌림 어른이 주신 선물일 거라며 작년에 며느리를 본 지인이 농담을 하며 웃는다. “이제 곧 시부모가 될 분들은 들어 보세요~ 며느리에게 버림받지 않을 선물은 현금뿐이랍니다.” 지인이랑 소원등 올리듯 남의 부적을 태워 올리며 허탈하게 웃었다.
부적을 보면서 나도 비밀스럽게 간직한 부적을 꺼내 자랑질한다. 부적은 돈 주고 사야만 제값 하는 게 아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내 부적은 내가 만든다.
나의 혼과 기를 넣어 만든 나의 방식을 소개하자면 마음에 드는 색종이에 내가 믿는 종교의 상징인 십자가를 그려 넣고,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요상한 글씨체로 나에게 언덕이 되고 힘이 되는 사람의 이름을 적고(나의 경우 친정아버지, 남편, 존경하는 사람) 감사와 소망을 담은 기도를 컨닝 페이퍼처럼 쓴다. 작게 접어 지갑 속에 넣는다. 끝이다.
그런데 그것이 겸연쩍고 우습지만 <시크릿>의 비밀처럼 확실한 효험이 있다고 믿는다. 작년에도 큰 사건·사고 없이 건강하게 한 해를 보내고 올해도 설레는 여행으로 시작했으니 부적의 효과 아니겠는가. 흐흐. 거기에 값어치는 내가 매기니 엄청 비싼 거다. 새해이고 돈 드는 것도 아니니 재미 삼아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어떤 빛은 야망
어떤 빛은 방황
가장 깊은 밤에 더 빛나는 별빛
밤이 깊을수록 더 빛나는 별빛
한사람에 하나의 역사
한사람에 하나의 별
70억 개로 빛나는 70억 가지의 월드
우린 우리대로 빛나
우린 그 자체로 빛나
해 질 무렵 고층 라운지 카페에서 BTS의 소우주라는 노래를 듣는다. 해거름에 시내를 돌다 보니 정말로 춥다. 금방 따뜻한 곳을 찾아 들어간다. 마음은 이게 아닌데 나이 듦을 느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난로인 양 기대며 종종걸음 하는 젊은이들이 부러워진다.
창가 건너편으로 보이는 반짝이는 간판으로 치장한 모텔의 풍경이 노래와도 너무 잘 어울린다. 불륜이니 뭐니 나쁜 쪽으로의 해석은 뒤로하고라도 그곳을 출입하는 연인은 사랑과 소망을 안고 역사를 만들러 가는 힘찬 발걸음이니 빛나는 인생이라 추켜주고 싶다. 삭막하고 고독한 세상에 서로에게 부적이 되어주는 연인들이다.
모텔을 보니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다. 좋은 터에 멋진 집을 지어 팔던 어느 건축가가 있었다. 나이가 들어 일을 못 하게 되자 조용한 산골로 귀촌했다. 언제부턴가 집 근방에 하나둘 모텔이 들어서더니 모텔 촌이 형성되었다. 놀러 온 지인들은 입을 모아 터가 나쁘다고 이사를 권했다. 그 건축가가 웃으며 말했다.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의욕이 넘치는 생활이라네. 열정이 있고 정열이 있는 곳에 기가 있는 것 아닌가. 무덤가에 살기보다는 살아있는 기운도 받고 얼마나 좋은가.”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다. 올해도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좋은 일의 첫 계단이라 생각하며 나도 누군가에게 부적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어느새 1월이 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