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런던, 세상 모든 기준은 나야 나(1)

[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바꾸고 싶지 않아 바꾸지 않는다 역사와 전통의 신생 국가 콤플렉스 세상 모든 것의 원조가 되다

2023-01-19     박재희 작가·모모인컴퍼니 대표
영국 동남쪽에 위치한 런던. 잉글랜드의 왕국 통일을 이루고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중절모를 쓰고 장우산을 든 신사. 내가 어렸을 때는 ‘영국의 상징’이라고 하면 모두 그런 모습을 떠올렸다. 요즘 친구들에게 영국으로 떠올리는 것이 무엇인지 물으면 한국이 배출한 월드 스타 손흥민과 프리미어리그 축구가 바로 튀어나온다. ‘신사의 나라’라든가 ‘전통과 역사의 나라’ 같은 수식어는 이제 낡아 맞지 않는 옷이 되어버린 느낌이지만 영국 사람들은 지구에 남은 마지막 공룡 같은 입헌군주제를 고수한다.

‘여왕이여 만수무강하소서’ 국가를 70년이나 부르게 했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죽고 영국 국가는 가사를 바꿨다. 지난달 카타르 월드컵을 통해 국제 무대에서 울린 영국 국가는 이제 왕의 만수무강을 노래한다. 21세기 유럽, 그것도 의회민주주의를 탄생시킨 나라 영국에서 통치하지 않는 왕이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지간하면 바꾸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매우 영국적이다.

영어는 잉글리시(English)가 맞고 영국 수도 런던은 잉글랜드에 속해 있지만 영국은 잉글랜드(England)가 아니다. 국제축구연맹(FIFA)에는 영국(UK)이 아니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총 4개 국가가 등록되어 있다. 영국은 4개 왕국(United Kingdom)의 연합인 것이다.

예전에 일하던 회사에 영국 에든버러 출신 동료가 있었다. 무심코 그를 잉글리시맨이라고 소개했다가 낭패를 본 일이 있다. 그는 불쾌한 기분을 감추지 않고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스코티쉬(스코틀랜드 사람)야. 절대로 잉글리시가 아니라고!”

영국 땅의 켈트 족, 앵겔스 족, 색손 족 등 민족으로 나뉘어 있던 여러 왕국의 정치적 통일은 불과 18세기의 일이고 아직도 민족을 뿌리로 한 지역색이 강하다. 영국에는 영국사람이 없다. 영국에는 스코틀랜드 사람, 잉글랜드 사람, 웨일스인, 북아일랜드 사람이 사는 것이다. 

영국 사람들은 유독 자기들이 원조라는 주장을 자주 한다. 럭비, 축구, 골프, 테니스, 배드민턴, 하다못해 애플파이의 종주국임을 주장한다. 말이 나온 김에 따져보자면 영국이 모든 것들의 종주국이라고 하기는 조금 뭣하다.

럭비는 그리스 로마시대 공놀이였다. 다만 영국이 1823년 최초의 럭비학교를 만들었다. 축구는 중세 스페인에서 하던 경기였다. 1863년 영국이 처음으로 현대 축구 협회를 조직했을 뿐. 그렇다고 해도 현재 런던에만 44개 축구팀이 있으니 그들이 축구에 진심인 것은 부인할 수 없겠다.

골프도 그렇다. 스코틀랜드 점령군이던 시저 로마군의 놀이였다는데 영국은 1608년 런던에 골프회를 조직하고 골프 규칙을 만들었다. 배드민턴 역시 영국 식민지 인도의 푸나 지역에서 하던 놀이다. 영국은 이름을 새로 짓고 1887년부터 게임 규정을 만들어 대회를 개최했다.

영국은 이렇게 존재하는 많은 것들을 자기네 식으로 부르고 규칙을 만드는 데 능하다. ‘세상의 기준은 나야 나!’를 외치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 사람들이 소울 푸드라고 부르짖는 애플파이마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처음 등장했으니 자기네가 원조라고 주장할 정도다. 이쯤 되면 종주국에 대한 집착에 가깝지 않을까?

사실 영국은 비교적 신생 제국이다. 이집트, 그리스·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나 네덜란드에 비해서도 가장 늦게 제국의 대열에 들어섰다. 아무래도 신생 제국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영국은 역사와 정통의 상징이 되는 것에 필사적인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서 종주국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템스강 유람선에 올랐다.

템스 강변의 런던 아이 /게티이미지뱅크

템스강은 말 그대로 잉글랜드 역사의 기록이자 상징을 따라 흐른다. 웨스트민스터에서 런던탑, 런던아이에서 그리니치까지 유람선에 올라서 느리게 지나며 영국의 역사를 더듬어보는 것은 재미와 무게가 모두 가볍지 않다.

서기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기념하여 템스 강변에 관람차를 세우며 런던 아이(London Eye)라고 이름 지었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는 런던의 눈이라는 런던 아이는 의회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빅벤, 영국 국회의사당과 사이좋게 서 있다. 빅벤은 현대 의회 민주주의의 출생지가 영국이었음을 증명하는 건축물이다.

노동조합과 현대 자본주의와 사회복지법, 신탁제도와 현대 금융까지 모두 출생지로 등록한 런던을 돌아 흐르는 템스강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하지 않는 모든 것이 런던에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

런던은 우주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런던에 있고, 런던에 없다면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다는 말은 그러므로 옳다. 런던이라는 우주에서 세상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방식으로 규정된다는 확신을 가진 인물들이 템스강을 피로 물들이며 역사를 만들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