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 어떤 요구도 '그러자'하는 친구가 있어 행복한 인생

[송미옥의 살다보면2] 폭설 속 4박5일 목포 여행기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을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가?

2023-01-18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전날부터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 발이 묶였다. /사진=송미옥

목포를 다녀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여행 가기 전날, 폭설경보가 떴다. 이런 날을 대비해 남쪽으로 가기로 한 건데 하필 눈 소식이 남쪽이다. 일기예보도 가끔은 틀리더라는 예상을 깨고 아침부터 눈이 내린다. 쉬엄쉬엄 가는 데까지 가보기로 한다. 그나마 오전이고 고속도로라 달릴 만하다.

4박5일 남쪽으로 방향을 잡고 예약한 숙소는 유달산 아래 게스트하우스다. 네 시간 만에 마지막 힘을 내어 미끌미끌 오르막을 겨우 올라 도착지에 닿는다. 숙소 창문에 비친 폰에서 미리 본 ‘化樣年華’(화양연화)' 네 글자. 아슬아슬 콩닥콩닥했던 우리의 오늘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된다.

젊은 주인은 출타 중이라 비번을 알려주며 당분간 주인이 되어 달란다. 창밖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꾹 참아 줬다는 듯 눈이 펑펑 내린다. 따뜻한 물 한 잔으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턱을 괴고 앉아 내리는 눈을 보노라니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다. 무료한 우리는 이른 저녁을 해치우고 이상한 게임을 한다. 마음속 숨어있는 불편한 것들을 잡아 목구멍으로 끌어내서 버리기다. 눈물을 글썽이며 속엣 말을 나눌 수 있어서 행복이다.

아침 일찍 골목에 눈 치우기 하는 친구들과 토끼모자 쓴 여인과의 만남이 새롭다. /사진=송미옥

다음 날 아침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엄청나다. 처음 눈 구경을 한 소녀들처럼 눈사람을 만들고 호들갑을 떤다. 그러다가 전화 한 통화에 아줌마로 변해 숙소 창고를 뒤져서 나무 판때기를 들고나와 도로에 쌓인 눈을 치운다.

즐겁게 눈을 치우는 이유는 작년에 근처(고흥)로 전근 온 친구에게 안부 전화를 하니 같은 전라도라고 호들갑을 떨며 밥 사주러 바로 출발한다는 거다. 이 눈길에 위험하다 만류해도 ‘눈 오면 밥 안 먹냐?’라고 응수한다. 지도를 보니 거리가 만만찮다. 걸어서라도 갈 테니 기다리란다. 군인들처럼 씩씩하게 눈 치우는 아줌마부대를 보며 게스트하우스 손님이란 걸 알아본 동네 사람 1.2.3이 한마디씩 덕담을 한다. 와중에 빨간 잠바에 빨간 토끼 모자 쓴 여인이 지나가다 동지를 만난 듯 호들갑을 떨며 말을 건다(그날 우리의 복장도 빨강이었다).

그녀는 우리 하우스를 제집같이 들어가더니 커피를 내려서 우리를 대접한다.

‘허걱···! 이곳은 당분간 우리 집인데 뭐지?‘ 그는 ’목포와 유달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어디에 전화를 걸어 조잘조잘하며 눈 치우는 우리를 칭찬한다. 조금 있으니 눈길을 뚫고 양손에 먹거리를 가득 든 전 주인이 기다시피 들어오고 밤길에 못 올라온 외박한 현 주인도 올라온다. 그들은 서로 가족 같은 이웃이란다. 모두 눈 치우기에 동원되고 웃음소리가 골목을 색칠한다. 행복한 동네다.

폭설을 뚫고 밥 사주러 오는 친구가 있다는 것도 행복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할 일이 있어서 만나는 게 아니란다. 그냥 보고 싶고, 마음이 쓰이니까 달려오는 거란다. 먼 거리를 여행 온 친구에게 밥을 사줄 수 있어 너무 좋다는 친구의 말에 무한한 감동을 받는다. 나도 누군가가 안동을 방문해 안부 전화하면 이렇게 멋진 말을 해야겠다. 오래오래 가슴이 달곰하다.

골목골목 역사와 스토리를 들려주는 여인 덕분에 목포를 사랑하게 되었다. /사진=송미옥

3일째, 눈이 쉬지 않고 내린다.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만나면 뚜벅이로 여행 가이드가 되어 주겠다던, 유달산을 지키는 토끼 모자 그녀를 길목에서 다시 만난다. 하루 만에 다시 보는데도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갑다. 그와 함께 눈길을 걸으며 다음날까지 골목 투어를 한다.

누군가 말했다. '등 따습고 배부르고 먹고사는 일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도 삶에서 어떤 의미도 어떤 스토리도 만들지 못한다면 살아있어도 떠도는 유령이나 다름없다'고. 그들 부부는 몸담아 일한 교육계를 정년퇴직하고 세계여행을 다니고 여유로운 생활을 했지만 무언가 공허한 부분이 있었단다. 우울을 극복하고 새로운 할 일을 찾아내어 노후를 색다르게 사는 분이다.

지극히 평범하다지만 평범한 행동이 아니다. 내가 사는 지역의 가난한 미술가들을 격려하고 투자하여 쉼터 곳곳 개인 소장품을 무료로 관람하게 해놓았다. 좋은 예술작품을 밀어주고 언덕이 되어주는 사람. 외국어에 능통하니 내가 사는 동네를 여행 온 세계인에게 멋지게 소개한다. 그가 유창한 언어로 말하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손바닥 만 한 비탈집과 골목골목의 역사가 수채화같이 그려진다. 특이하고 멋지게 노후를 살아가는 목포의 숨겨진 인간보석이다. 목포를 사랑하게 만든 그녀가 보고 싶어 조만간 다시 찾을 거 같다.

관광이 아닌 여행의 참맛을 알려준 골목투어 중 한 골목. /사진=송미옥

노후에 중요한 것 중 한 가지는 마음 맞는 여행 메이트가 있는 것이다. ‘이번엔 이런 여행 어때?’ ‘이걸로 먹어볼까?’ 누군가가 선창하면 ‘그러자~’하고 동의해주는 ‘그라지예(그러자를 경상도 높임말로 써서 만든 모임 이름)친구’들이 있어서 참 좋다.

강원도에 폭설이 내려 차들이 엉키고 난리가 난 뉴스를 보며 사고 없이 무사귀가를 기도한다. 눈을 보니 쌓인 눈 덕분에 뚜벅이가 되어 골목골목을 걷고 또 걸었던 남도 여행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