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민원 더봄]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

[손민원의 성과 인권] "저의 걱정은 유료로 판매합니다" 잔소리 대신 소통하는 명절 되길

2023-01-15     손민원 성ㆍ인권 강사

“저의 걱정은 유료로 판매하고 있으니 구입 후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카드 결제도 환영. “모의고사는 몇 등급 나오니?” 5만원, “대학 어디 어디 지원할 거니?” 5만원, “살 좀 빼야 인물이 살겠다.” 10만원, “취업 준비는 아직도 하고 있니?” 15만원, “나이가 몇인데 슬슬 결혼해야지?” 30만원, “너희 애기 가질 때 되지 않았니?” 50만원. 누군가가 연휴 동안 듣기 싫은 말들을 모아 가격을 매겼다.

명절날 친척들을 만났을 때 나오는 대학-취업-결혼-출산 등으로 이어지는 질문들은 ‘연휴 기간 가장 듣기 싫은 말’의 ‘잔소리 메뉴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명절날 친척들을 만났을 때 나오는 대학-취업-결혼-출산 등으로 이어지는 질문들은 ‘연휴 기간 가장 듣기 싫은 말’의 ‘잔소리 메뉴판’이다. 강의장에서 젊은이들에게 이 메뉴판을 보여주니 격하게 공감하는 반면, 어르신들에게 이 메뉴판을 보여주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을 좀 더 오래 산 사람의 경험에 비추어 아랫사람에게 ‘다~ 잘 되라’고 하는 덕담인데, 이것을 잔소리로 듣는다니… 쯧쯧쯧.” 세대 간의 생각의 차이가 잘 드러나는 반응이다.

여하튼 이 메뉴판이 흥미를 끄는 것은 우리 사회가 특정한 나이에 맞는 사회적 역할을 요구하거나 나이가 들어서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가져야 한다는 방식의 ‘생애 주기적 달성 과업’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무엇이든 다 때가 있는 법’이라며 교육받아야 하는 나이와 취업할 나이, 결혼해서 출산해 육아를 하고⋯. 생애 주기별로 이뤄야 하는 과업에 대한 책무를 부여하고 그에 대한 압박이 가해진다.

이런 고정된 생각들은 나이가 많아서 혹은 적어서 겪어내야 할 부당한 차별과 연결된다. ‘때가 있는 법’에서 ‘그때’를 벗어난 행동은 좀 비정상적인 게 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경제활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어린이, 청소년, 노인은 나이로 인해 겪어내야 하는 어둠이 존재하게 된다.

‘나이주의(Ageism)’는 나이에 따른 차별, 그리고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행사되는 체계적인 고정관념과 차별의 과정이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노인 인구가 많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흔히 고령자를 싸잡아서 융통성이 떨어지는 ‘꼰대’로 지칭한다.

나이든 것이 유세가 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회에서 무시받아야 할 대상이 돼서는 안 된다. 젊은이의 경제 활동에 의존해 살아가는 지하철 무임승차자로, 무능력한 사람으로 노인 비하, 혐오, 학대 문제가 비일비재하게 나타난다. 60세를 넘기고 일하고자 할 때는 자신의 경력과 무관한 질 낮은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현실에서 살아간다.

반면에 어떤 때는 나이가 많은 것이 권력으로 행사되기도 한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디 어른에게 또박또박 말대꾸야.” 사실 잔소리 메뉴판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던 어르신은 ‘아랫사람’이라는 표현을 썼다. 나이에 따라 윗사람과 아랫사람으로 나누는 것부터가 나이주의에 의한 차별적 단어라 볼 수 있다.

가족과 친척이 모이는 설 명절이 다가온다. 그런데 너무나 친밀한 관계 속에선 자칫 개인과 개인 사이에 경계를 넘어서는 일방적 조언이나 잔소리가 마음의 큰 상처로 남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어린이나 청소년에게는 당연히 무시하고 하대하는 것, 어린 사람인 어린이, 청소년은 미래의 새싹이므로 현재는 없고 오로지 미래의 희망만을 위해 오늘을 정진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진다. 이런 생각이 어린이, 청소년에게 인권 침해를 유발하고 정당화하는 중요한 이데올로기다. 이때 연소자인 어린이, 청소년, 노인 모두는 차별의 피해자가 된다.

누군가로부터 존중받는 것에 나이가 잣대가 돼선 안 된다. 행복을 온전하게 누리는 것에 나이가 어리거나, 나이가 많거나에 구애돼서는 안 된다. 우리 모두는 나이에 딱 들어맞는 어떤 인생 과업의 틀에서 좀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과 조금 다른 길을 가더라도 느긋하게 바라봐 주고, 나도 내가 기꺼이 선택한 ‘나의 때’를 주변 사람들에게 응원받고 싶다.

가족과 친척이 모이는 설 명절이 다가온다. 그런데 너무나 친밀한 관계 속에선 자칫 개인과 개인 사이에 경계를 넘어서는 일방적 조언이나 잔소리가 마음의 큰 상처로 남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올 명절에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조언하기보다는 비록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생각을 더 많이 들어 보고, 눈을 마주하며 공감하면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으로 채우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