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주 더봄] 가족과 함께 느끼는, 나이를 먹는다는 것
[김현주의 텐션업 갱년기] 새해인사차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 성장과 변화를 전하는 소중한 시간
새해를 맞이하며 요 며칠 많은 분들과 안부를 나누었다. “복 많이 받으세요” “건강하세요” “뜻하시는 일 기분 좋게 이루세요” 등 덕담을 주고받으며 활기찬 시작을 서로에게 기원했다.
시간을 쪼개 가족들도 만났다. 회사 일이 바빠 어떻게 연말을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없었지만, 그래도 한 해를 시작하는 날이니 같이 모여 차 한잔 하고 싶었다.
‘큰아빠 집에 가자’라는 아이의 말에 떡국을 챙겨 먹자마자 집을 나섰다. 명절은 구정으로 쇠지만 그래도 이런 날에는 시끌벅적하게 가족들과 함께하는 게 좋지 않은가.
올해 고등학생이 되는 아이도 오랜만에 보는 언니와 나누는 수다가 신나 보였다. 열 살이 넘게 나이 차이가 나는 언니들이지만 형제가 없어서 그런지 만나기만 하면 옆에 바짝 붙어 자기의 근황을 술술 풀어놓는다. 조카와 딸이 이야기하는 걸 멀찍이 바라보고 있으니 새삼 아이들이 많이 컸다는 걸 느낀다.
딸아이가 SNS를 통해 친구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좋아하는 친구와 조금은 껄끄러운 친구에 대해 속 마음을 털어놓자, 기분 좋게 맞장구를 쳐주던 조카가 그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본인의 경험을 끌어내며 조언을 해주는 게 아닌가. 언니라서 가능한 조언, 그래서 엄마의 말보다 어쩌면 더 공감이 가는 이야기들 말이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아이들이 이제는 진지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큰 모습을 보니, 가족들도 자라고 관계도 성장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어제는 친정 식구들 모임이 있었다. 할아버지 제삿날이기도 했고, 때마침 호주에 사는 사촌동생이 몇 년 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한 참이라 겸사겸사 큰아버지 댁에 모두 모이게 됐다. 네 분의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사촌 오빠와 동생들, 조카들까지 모처럼 많은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으며 안부를 나누었다.
7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조카들의 훌쩍 큰 모습을 보며 시간이 참 빠르다는 이야기도 했고, 사촌 동생 내외의 호주살이에 관해 들으며 그간의 시간을 짐작했고, 외국에 다니며 사업하느라 한동안 얼굴을 못 보았던 또 다른 사촌 동생과 술 한잔도 나누었고, 큰아버님 내외가 지난해부터 키우기 시작한 고양이를 소재로 한참을 웃기도 했다.
특별한 사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이야기는 쉼 없이 이어졌다. 그동안 지내온 시간에 대해 귀 기울이고, ‘힘들었겠네’, ‘너무 잘됐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데’라며 따뜻한 관심을 나누는 시간이야말로 가족이 함께하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십 대가 된 손주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앞에 앉아 하고 있는 일과 아이들 이야기를 나누는 자식들. 우리 가족도 이렇게 시간을 쇠고 있구나를 느끼며, 어렵겠지만 이런 자리를 조금은 더 자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큰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들 쪽으로 오셨다. “이것들 봤어?” 액자 속에 담긴 훈장들을 가리키며 하나하나 설명을 시작하시는데, 마침 액자 아래쪽에는 군인으로 예편하신 큰아버지의 오십 대 사진이 놓여 있었다. 딱 우리 나이 때의 큰아버지 모습이다.
말씀을 이어 가시던 큰아버지는 자식과 조카들을 일으켜 세웠고, 또 다른 사진들이 걸려 있는 거실 한 쪽으로 향하도록 했다. “거기 걸어 놓은 사진들 좀 보고 와라, 그게 언제적인지, 참” 벽에는 크고 작은 십여 장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는데, 아마 얼마 전에 두 내외분이 정리해 두신 듯했다.
사촌 오빠와 동생이 군복을 입고 큰아버지 내외분과 함께 찍은 오래 전 가족사진부터 아이들(손주들이 아닌 우리들)이 어렸을 때 삼삼오오 만났을 때마다 찍었던 사진들, 아버지 형제분들이 어딘가 놀러 갔을 때 찍었을 법한 야외 단체사진까지, 가족들이 함께 지내온 수십 년의 세월이 사진 속에 담겨 있었다.
찬찬히 들여다보다 한 장의 사진에 눈이 멈췄다.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거실 의자에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이었다. 어림잡아 40대쯤으로 보이는 두 분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는데, 지금의 우리보다 젊은 모습이었다.
‘맞다, 저런 때가 있으셨는데. 볼에는 살이 있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은 윤기가 났으며, 눈매는 강건하고, 자신감 있는 미소를 보이던.’ 중얼거리며 멀리 앉아 있는 두 분을 바라봤다. 팔순을 훌쩍 넘은 두 분의 모습에서 사진 속 꼿꼿함은 찾아볼 수 없었지만, 여전히 나란히 앉아 있으셨다. 구부정한 허리, 깊은 주름이 군데군데 패여 있는 얼굴, 그러나 훨씬 부드러워진 미소를 띄우며.
“자, 우리 이렇게 다 같이 모이기도 어려운데, 사진 한 장 찍을까요? 소파 쪽으로 모여 주세요.” 갑작스런 나의 제안에 다들 즐거워했고 어르신들도 이리저리 자리를 바꿔가며 휴대폰 카메라를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연신 “카톡으로 보내줘”라고 말씀하시면서 말이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이 사진들은 프린트해서 드릴테니 벽에 걸린 사진 옆에 한 장 더 걸어주세요”란 내 말에 더 좋아하신 건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