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개나 소나 할 줄 아는 김치찌개는
[송미옥의 살다보면2] 한국인의 밥상에 명불허전은 김장김치 유통기간 끝나갈 즈음 김치찌개로 부활
김장철이 지나간다. 올해도 딸아이가 싣고 온 차 트렁크와 뒷좌석에 통이 만석이다.
차곡차곡 쌓아서 갖고 온 지저분한 김치통이 10개가 넘는다. 먹다가 만 것, 배추 대가리만 담긴 것, 국물만 남은 것 등등. 나는 먹을 만한 묵은지는 추려내고 나머지는 땅을 파서 묻는다. 우물가로 갖다 날라 물을 담아 한참 우려내고 깨끗이 씻어 차에 다시 실어준다. 딸은 옆에서 거들며 아파트에선 이렇게 물을 쏴하게 틀어놓고 시원하게 씻을 수 없었는데 속이 확 풀린다며 깔깔 웃는다.
“이 인간이 엄마를 부려먹으면서 웃음이 나오냐.“
말로는 핀잔을 하면서도 조수 노릇을 해주는 이유는 주말이면 시댁으로 김장하러 가기 때문이다. 그때 가서 녹초가 될 터이니 전반전을 조금 거들어 주는 셈이다.
김장전쟁을 치르기 위해 흩어져 사는 형제를 집합시키고 당일 먹을 음식도 미리 전화로 예약하는 등 분주하다. 폰을 마치 무전기인 양 들고 떠드는 딸을 보며 라떼타령에 잠시 잠긴다.
가난한 시절, 겨울나기에는 연탄과 김장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요즘같이 김치속이 화려하길 하나. 어머니는 년초에 바다생물을 기차로 싣고 와 마을을 도는 장사꾼에게 주문한 생멸치를 켜켜이 소금 뿌려 일 년 동안 삭힌 갈색 젓갈을 최고의 양념으로 쳤다. 김장철이면 집집마다 젓국 달이는 냄새로 골목까지 비릿했는데 그날의 꼬리한 냄새에 어른들은 누구누구네 김장 맛이 어떨꺼라고 미리 단정 지었다.
우리 집도 잘 여문 통배추는 돈으로 교환하고 통이 되지 못한 퍼드러지고 허접한 것만 골라 소금을 듬뿍 뿌려 절였다. 다음날 고춧가루와 마늘 같은 양념은 넣은 건지 만 건지 모를 만큼 멀건 젓갈 양념에만 대충 버무려 땅에 묻어 놓은 단지에 담았다.
절임배추가 남으면 무를 소금에 절여 깔고 젓국물에 살짝 휘저은 절임배추를 위에 덮어 넙적한 돌을 씻어 얹었다. 긴 두레박질로 길어 올린 지하수만 부어 소금을 뿌리고 덮었다. 짭짤하고 희한한 물김치는 사이다맛을 내었다. 겨울의 백미였다.
그때엔 물김치로 사람을 살리기도 했다. 자다가 연탄가스에 쓰러지기도 했는데 그땐 물김치가 명약이 되었다. 가끔씩 나는 지난날의 그 김치 맛을 내보려고 양념 없는 얼치기 김장을 해보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딸이 분주하게 설치는 꼴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큼은 닥치면 닥치는 대로 부딪쳐보는 제 애비를 닮았다. 아이의 입장에서 살펴보면 친정엄마보다 시어머니의 삶이 마음에 와 닿은 것 같다. 조금 힘들어도 내가 먼저 베풀고 웃어주는 것이 가화만사성의 기본이라는 것을. 소포장에 바로바로 먹고 없앨 수 있는 마트 음식에 길들여진 지금 세대에게 그 어떤 일도 귀찮고 번거로운 일일 텐데 말이다.
딸이 말했다. “어머니 안 계시면 하고 싶어도 못 할 일이자너.” 모든 건 마음먹기 나름인 것 같다. 내 딸이지만 마음 씀이 예쁘고 기특하다. 대가족이 양념 통에 둘러앉은 모습이 폰으로 송출되어 온다.
어느 책에서 그랬다. 친절한 척 하다 보니 친절하게 되더라고, 어색한 일도 자꾸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당연한 일상이 된다. 언젠가 부모가 떠나도 그때의 묵은 정은 힘들었지만 재밌고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방송에서 들은 재밌는 김치찌개 이야기가 있다. 묵은김치로 만든 김치찌개는 가장 쉽고 레시피 없이 만들 수 있는 민족 음식이다.
어느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아들이 뭘 잘 먹는지 물었다. 아들이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한다는 며느리 대답에 시어머니는 속이 상해 빈정거리며 말했다. “얼마나 먹을 것이 없으면 개나 소나 다 만들 수 있는 김치찌개를 좋아하겠냐.“ 며느리는 민망하고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그때 아들이 버럭 하고 나서서 엄마에게 소리 질렀다. “어머니~ 개나 소나 다 하는 그 음식만 20년을 질리도록 먹다가 집 떠나니 그 음식이 가장 먹고 싶은 음식이 되었어요. 당장 사과하세요. 가장 맛있고 정성스레 음식을 만들어 주는 나의 셰프 부인과 김치찌개에게요.”
현명하고 밉살스런 아들 말이 잘 익은 김장김치 맛같이 감칠 나게 들린다. 추려낸 남은 김치로 김치찌개나 한 냄비 해놓아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