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권 더봄] 호박 비닐하우스에 매일 불경을 읽어주었더니···

[정진권의 고향 정착기] (4) 가을걷이 끝난 논에 하우스 세 동 설치 2개 동에 호박 심어 1500여 박스 생산 천수경 낭송하며 지극정성 키우자 보답

2022-10-23     정진권 남인수기념사업회 사무국장

고슴도치도 자기 새끼들을 사랑한다고 한다. 자신이 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한 사람도 자기 자식이나 손자 손녀들은 사랑스럽고 애정을 넉넉히 가지리라.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탐욕심이 가득 찬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은 아끼고 사랑한다고 하자. 그 사람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그 당사자도 밉지만 그가 사랑하는 그 가족들도 당연히 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대로 주위 사람들에게 많이 베풀며 살아온 사람은 우선 그 마음부터가 편안하고 몸에서 풍기는 기운이 따뜻하게 배어 있을 터이다. 그리고 베풀었던 이가 세상을 떠나고 없을 경우라도 이웃 사람들은 남은 그 가족들에게 덕담을 해주거나 어려운 일이 닥치면 해결해 주려고 애를 쓸 터이다.

 

나는 아내에게 화가 났을 때는 작물 가까이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화가 나면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독기를 식물이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티이미지뱅크

나는 아내에게 화가 났을 때는 작물 가까이 가지 말라고 충고한다. 화가 나면 내 몸에서 풍겨 나오는 독기를 식물이 느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초에 모든 생명체는 바다에서 생성이 되었지만, 그 근원은 한 군데서 발원하여 여타 생명체로 진화해 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최고의 고등동물이지만 다른 동물이나 심지어 식물에까지도 서로 파장이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이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을 알 수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는 탐욕심과 화내는 마음과 어리석음 때문에 먹구름이 태양을 가려서 환한 세상을 못 보게 하듯이 그러한 마음들이 사람의 지혜로움을 가로막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탐진치(貪瞋痴)’라는 먹구름을 걷어내고 지혜를 얻기 위해서 기도하고 수행을 한다. 

나는 농부의 아들이었다. 어린 시절 농부의 아들들은 봄이면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기 전에 꼴망태를 매고 논두렁이나 보리 고랑에 들어가서 집에서 키우는 소 먹이를 만들 꼴(목초)을 한 망태기 베어서 메고 왔다.

오뉴월 모내기철이 되면 어른들은 볍씨를 물에 담가 싹을 틔우고 모판을 만들었다. 모판에서 키운 모를 한 주먹씩 뽑아 묶어서 모 심을 논으로 옮길 때에는 온 동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또 누구의 논이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 품앗이로 협력하여 옮기고 또 온 들판에 심었다.

 

벼농사를 짓던 논에 추수가 끝난 뒤 하우스 세 동을 짓고 그중 2개 동에 호박 모종을 심었다. /사진=정진권

여름에는 어른들을 따라서 벼가 자라는 논에 들어가서 논을 매기도 하고 소를 먹이러 산으로 냇가로 소를 끌고 다녔다. 동네 소가 다 나와서 한꺼번에 동네 산에다 풀어서 방목을 하는데 비록 온 동네 소가 다 모이지만 소들은 또 그들만의 세상이 있어서 모이면 왕초 소가 있었고 그 소가 이끄는 대로 수십 마리의 소떼가 몰려다녔다.

가을이 오면 수확을 할 시기라 농촌에서는 모내기 이후로 가장 바쁜 날들이 기다린다. 농민들은 봄에 심었던 대부분의 곡식들을 다 수확하지만, 그 중에서도 벼를 베어서 묶은 볏짐을 지게에 얹어서 지고 집 마당으로 옮겨 타작하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게으른 사람이 짐을 무겁게 진다고 하는데 내가 그랬다. 어른들이 나에게 충고를 하는데도 나는 지게에 내 힘에 부대낄 정도로 볏가리를 많이 올렸다. 그러다가 한 번은 등뼈에 물집이 생기더니 터져버렸다. 비가 오려고 해서 결코 하던 일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그 상처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이를 악물고 끝까지 그 논에 있던 벼를 다 짊어지고 옮겼던 기억이 난다.

타작은 주로 컴컴한 새벽에 하는데 아이들도 ‘홀깨’라고 하는 탈곡기 옆에 붙어서 한쪽 다리로 탈곡기를 움직이게 하는 페달을 밟아 탈곡을 거든다. 어머니는 타작을 하기 전에 멸치와 김치를 넣은 멀건 국밥을 만들어 주는데 나는 아직도 그때 먹었던 국밥이 그리울 때가 종종 있다.

겨울에는 한가한 철이라 친구들과 어울려 구슬이나 딱지치기도 하고, 너른 묏등에서 술래잡기를 하거나 동네 어귀에서 기다랗게 그림을 그려놓고 편을 갈라서 멀리 떨어진 목표 점에 먼저 가서 발로 도장을 찍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친구나 동네 형들과 함께 동네 주변 산에 나무하러 다녔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나무를 하다 보니 마을에서 가까운 데는 이미 벌겋게 민둥산이 되어 버린다. 동네 형들을 따라 500m 고지 봉대산으로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지게에 새끼줄과 낫과 까꾸리(갈퀴의 사투리)를 가지고 올라간다. 새끼줄을 세 줄로 나란히 놓고 그 위에 솔가지는 얹고 까꾸리로 갈비(솔가리, 솔잎 떨어진 것)를 긁어모아서 얹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그 산 너머에서 우리 형들보다 나이가 더 많은 형들이 나무하러 오더니만 깔아놓은 새끼줄을 다 걷어서 가져가 버리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걱정을 많이 했는데 그 형들은 우리에게 장난을 쳤던 것이었다. 땔감으로 쓸 만한 나무가 없다고 투덜대면서 다시 산으로 올라오더니 우리들에게 새끼줄을 돌려주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첫해인 지난봄 볍씨를 물에 담그고 벼농사부터 시작했다. 절반은 동네 친구가 지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우리 벼는 무럭무럭 참 잘 자랐다. 너무 잘 자라다 보니 비가 오고 태풍이 불자 약 1000평 되는 논에서 벼가 절반은 쓰러져 버렸다.

구렁논은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기계로 베기도 어렵다고 했다. 아내와 나는 발도 잘 빠지지 않는 구렁논에 맨발로 낫을 들고 들어가서 벼를 직접 베었다. 빠지지 않은 물 때문에 줄기까지 다 썩어가면서도 벼는 남은 영양분을 낟알로 다 보내고 있었다. 물론 이 벼가 주인인 나를 위해서 그렇게 자신을 불태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라는 것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지 한 눈에 알 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그 논에 하우스 세 동을 지었다. 11월 19일부터 시작하여 일주일 만에 완성이 되었는데, 파이프를 구입하여 인근에서 하우스를 매우 잘 짓는다고 소문난 진 사장이란 분에게 특별히 부탁을 하여 지은 것이다. 그러자 동네 친구의 권유로 11월 30일에 모종을 심을 것을 가정하여 육묘장에 호박 모종 1800여 주를 미리 주문해 놓았다.

그러나 하우스를 짓고 거름을 깔고 트랙터로 논을 갈았는데도 구렁논의 물은 좀체 빠지지 않았다. 호박 모종을 심을 둔덕에 있는 흙이 덩어리가 져서 모종을 심어도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 되어버렸다. 모종을 심을 날을 넘겨 서리가 내리고 날은 차츰 차가워져 갔다. 그러자 들판에서 하우스를 하는 이웃 사람들은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사는 옛 친구가 찾아와 호박 농사를 짓는 비닐하우스를 살펴보고 있다. /사진=정진권

‘이 논에 모종을 심어봤자 소용이 없다. 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심어야 한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아이를 낳기 힘들 듯이 늙은 모종을 심어서는 열매를 생산하기 어렵다. 기존에 주문한 모종은 다 폐기처분하고 육묘장에다 모종을 다시 주문해서 심어야 한다.’ ‘다시 주문해서 심으면 이미 날씨가 차가워서 나무를 키우기가 힘드니 그냥 기존 모종을 심어라.’

우리 부부는 하우스 농사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는데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엇갈렸다. 나는 우리가 주문한 모종을 살려보지도 않고 폐기처분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기존 모종을 그대로 심기로 했다.

12월 20일, 드디어 2개 동에 호박 모종을 심었다. 난방과 급수용으로 사용할 지하수의 양이 모자라 1개 동은 놀리기로 한 것이다. 이날은 인근에 있는 친구들이나 아는 형들을 다 불러서 힘을 보태게 했다.

모종을 심고 나는 매일 호박 하우스 안에 들어가서 천수경(千手經, 불교경전)을 낭송해 주었다. 드디어 호박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예전에 ‘호박꽃도 꽃이냐’라는 말도 있었는데 나는 호박꽃이 이렇게 예쁜 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다.

호박은 수꽃이 있고 암꽃이 있다. 원래는 벌들이 날아와서 수꽃가루를 묻혀서 암꽃 수술에 수정을 시키지만 하우스 농사에서는 수꽃가루를 물에 타서 파는 약품을 사서 농민이 직접 암꽃에다가 뿌려 수정을 시킨다. 나는 매일 아침 해가 뜨면 하우스에 들어가서 암꽃에다가 수꽃가루를 탄 약을 칙칙 뿌리고 다녔다.

암꽃들은 내가 나타나면 어찌나 환하게 웃던지···. “오빠, 오빠.” 여기 저기 100m 터널의 하우스 곳곳에서 나를 부르는 호박꽃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물론 수꽃들도 “엉아, 엉아(형의 사투리)”하면서 나를 불렀는데 아내는 수꽃은 보이는 대로 다 꺾어버렸다. 모든 생명체는 암컷이 아주 소중한 것이다. 왜냐하면 암컷은 생산을 하기 때문이다.

올해 2월 7일, 마침내 하우스 두 동에서 생산한 호박 10kg 네 박스를 서울 가락시장 경매장에 시집을 보냈다. 그야말로 우리도 암울한 긴 겨울을 넘기고 노란 희망의 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호박은 우리가 기도하고 정성을 들인 만큼 무럭무럭 잘 자랐고 건강하게 생산을 잘했다. 5월 7일까지 3개월 동안 하우스 두 동에서 10kg 한 박스에 호박이 약 스무 개 정도 들어가는데 약 1500여 박스를 배출했다.

3월이 지나고 4월이 되어 온도가 올라가고 날씨가 따뜻해지자 병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유기농을 고집하여 유황이 섞인 유기농약과 지난겨울에 만들었던 은행 삶은 물을 타서 뿌려 주었는데 그야말로 호박과 한 뜻, 한 몸이 되어 진딧물과 끝없는 전투를 벌였다. 진딧물을 잡으니 흰가루이 병균이 돌기 시작하였는데 호박은 그 넓은 잎이 흰가루이에 하얗게 덮이면서도 열매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호박은 우리가 기도하고 정성을 들인 만큼 무럭무럭 잘 자랐고 건강하게 생산을 잘했다. 5월 7일까지 3개월 동안 하우스 두 동에서 10kg 한 박스에 호박이 약 스무 개 정도 들어가는데 약 1500여 박스를 배출했다. /게티이미지뱅크

결국 5월 7일, 나는 큰절을 올려 호박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천수경(千手經)으로 마지막 헤어짐을 고(告)하였다. 호박 뿌리를 뽑으면서 내 눈에 눈물이 고였는데 그 뿌리가 꼬마 아이들의 발보다도 더 작았다.

“이 작은 뿌리로 너희들이 그 많은 생산을 하였더냐! 고맙데이. 잘 가거라, 내 아이들아!”

아마도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그 호박들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