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미옥 더봄] 하루를 살아도 너(酒)와 함께 살리라(3)
[송미옥의 살다보면2] 혹 떼려다 혹 부치고 살게 되다 자기 인생은 자신이 책임지는 것
이불 밑 송사가 가장 효과가 있다는 동네 어르신의 말씀에 어르고 달래서 드디어 금주 언약을 받아냈는데··· 다시 무효가 되었다. (전편에 이어)
마을 어른들까지 남편 편을 들다니···. 이래저래 화가 치밀어 싸움을 걸어도 그는 마음을 굳힌 듯 대꾸도 안 했다.
애당초 그는 조용히 생각할 것도 있고 하니 잠시 마음 정리하고 오겠다 했다. 그러나 나는 20년 하던 사업을 한달 만에 정리하고 이삿짐을 싣고 뒤따라 내려왔다. 순간, 그는 짐과 함께 700고지 산꼭대기에 나타난 나를 보고 놀라움에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땐 내 사랑에 감동이 밀려와 그런 줄 알고 내심 뿌듯했다.
지나고 보니 생각도 없고 대책도 없이 일을 벌인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갑갑했을까. 또한 종일 마주보며 일년을 살아보니 25년 만에 발견한 얼굴의 작은 점도 현미경으로 보듯 커 보이고 그것이 바로 떼어내야 할 것처럼 찝찝해 시빗거리가 되기도 했다. 위로와 사랑으로 보조약이 되어야 할 일상의 대화는 마른 낙엽 부서지듯 서걱거렸다. 게다가 명상은커녕 생각할 겨를 없이 따라다니며 잔소리를 해대니 암으로 죽기보다 화병으로 죽었으리라.
나는 나대로 힘들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부모님 다 떠나고 남편까지 없는 상황은 생각만 해도 무서웠다. 젊은 나이 40대라 그랬을 것이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이곳까지 따라와 자존심 상하고 불안하게 사느니 아예 남편보다 먼저 죽고 싶었다. 문득, 죽은 부인을 정성으로 염하시던 아버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체질적으로 술을 못 마신다. 술을 끊기도 힘든 만큼 배우기도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남편을 살리려면 오직 술을 끊게 하는 것이 첫 번째라는 신념은 더욱 확실해졌다.
남편이 식겁을 하든 아니면 질겁을 하고 반성하게 만드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어느 날, 그가 마시던 술병을 빼앗아 속된 말로 나발을 불었다.(이 글을 쓰면서도 참 부끄럽고 한심하다. 흐흐.) 사약을 마시듯 억지로 마셨다. 잠시 후 온몸이 불이 붙은 듯 달아올랐다. 무거운 머리가 가마솥 들썩이듯 터질 것 같더니 천장과 벽이 나를 조여 왔다. 급기야 집이 흔들리며 돌기 시작했다. 내장이 뒤집어졌다. 그러고는···.
죽은 건지 산 건지 나는 시원한 바다 모래밭에 누워 있었다. 비몽사몽 긴 꿈에서 깨어나니 나는 까칠한 여름 이불 위에 오줌을 싸고 누워 있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려고 하니 남편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다시 죽은 체했다. 방에 들어온 그는 아버지가 죽은 엄마를 염하듯 나를 물수건으로 닦고 옷도 갈아입혔다. 나는 새로 깔아놓은 옆 이불로 멍석말이하듯 데굴데굴 옮겨졌다. 남편은 오줌과 구토로 젖은 이불을 둘둘 말면서 구시렁거렸다.
“어이그, 멍청한 아줌마야. 술 마셔서 죽을 거면 이 풍진 세상에 살아있을 인간이 하나도 없다. 주도(酒道)도 모르는 인간이 까불고 지럴을 해요. 지럴을.“
다음날 오후까지 심한 두통으로 내가 도로 식겁을 먹었다. 남편은 들락날락하며 내 상태를 점검했다. 누가 더 힘들고 뭐가 더 아픈 걸까. 죽음을 앞두고 세운 남편의 버킷리스트를 내 욕심 채우려고 고집부리는 나.
그러나 그 모든 투쟁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배고픔이었다. 남편이 된장국을 잘 끓인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가 차려준 밥상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숙취 해소엔 된장국이 최고다. 하하. 이후 나는 남편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술상을 차리는 여인이 되었다.
그의 표정만으로도 나의 치부를 동네방네 떠들까봐 전전긍긍하면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