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d의 역습]⑩ 엔화 약세란 잘못 끼워진 단추···강한 통화는 축복

엔화 가치와 인플레 맞바꾼 일본 경제력 추락하고 국민 가난해져 원화 절하율 세계 1위 韓도 위험

2022-10-06     이상헌 기자

"어떤 나라도, 심지어 최빈국도, 건전한 통화(Sound money)에 대한 희망을 포기할 필요가 없다. 환율을 올라가게 만드는 것은 개인들과 그 공동체의 빈곤, 외국에 빚을 지고 있는 상태, 나쁜 생산조건이 아니라 바로 인플레이션 그 자체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화폐와 신용』

반세기 만에 스태그플레이션 시대가 돌아왔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 금리를 0.75% 포인트 인상한 자이언트스텝을 단행했다.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파월에게 레이건 시대 폴 볼커의 역할을 요구할 만큼 글로벌 경제가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도 연방준비제도(Fed)가 볼커를 소환해 초고강도 금리 인상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시 소련과 동유럽이 겪었던 위기는 비기축통화국인 신흥국에 곧바로 닥칠 전망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자동현금인출기(ATM)로 불리는 한국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국내외 경제는 1970~1980년대와 데칼코마니 양상이다. 여성경제신문이 당시와의 유사점을 살펴보고 미국의 긴축 정책이 국내외 경제에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편집자주]

① 반세기만의 스태그플레이션과 자이언트스텝'
② 반복하는 위기···한국 1970년대와 뭐가 다른가 
③ '회색코뿔소' 앞 파월, 고용 믿고 경제위기 부정
④ 버블 붕괴 템플릿 : 닷컴과 모기지의 배신
⑤ ‘거인’이 된 美 연준‧‧‧신흥국 자본유출 ‘공포’
⑥ 준칙과 재량 사이···파월 vs 이창용 엇갈린 노선
⑦ 장·단기 금리 역전 현상···한국도 얼마 안남았다
⑧ 연준 ‘거인 걸음’ 가능성에‧‧‧R의 공포 엄습한 美
⑨ 서브프라임 버블붕괴 데자뷔‧‧‧韓 집값 24.8%↓
⑩ '엔화 약세'란 잘못 끼운 단추···강한통화는 축복
⑪ 환율참사 불 지핀 尹 경제라인 책임 어디까지?

2000년대 초반 1달러당 75엔으로 강세를 보였던 일본 엔화가 아베 전 총리의 무제한 양적완화 정책으로 인해 달러당 140엔대로 가치가 추락했다. 일본 1000엔짜리 지폐 모습. /일본은행

비싼 화폐는 물가 상승 압력을 완화시킨다. 화폐 단위당 구매력이 커지면 물가는 상승 속도를 늦추거나, 심지어 떨어지는 현상도 벌어진다. '잃어버린 20년' 끝무렵 일본 경제에 무제한 양적완화란 쓰나미가 등장하기 전의 얘기다.

먼저 일본은 1992년부터 2001년까지 잃어버린 10년의 경제불황을 겪어야 했다. 또 불황을 빠져나온 이후(2001년부터 2012년까지)에도 엔화 강세 속 국내 물가 수준이 정체 상태를 유지하는 디플레이션이 이어졌다. 또 그 여파는 지금도 남아 있다.

일부 학자는 일본 경제가 물가하락에 따른 실질 자산가치 하락이 개인소비를 압박하고 이것이 다시 물가하락을 초래하는 이른바 디플레 악순환(deflationary spiral)에 빠졌다고 비판한다. 영국의 감세 정책이 소비 증가를 불러 인플레이션을 부추길 것이란 국제통화기금(IMF)의 주장도 유사한 발상에서 나온 논리다.

경제력의 징표가 되는 '강한 통화'
명동 가득 채웠던 일본인이 증거

2000년대 초반 엔화 가치 강세는 일본 내 상품 가격을 떨어뜨리는, 즉 물가를 하락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특히 외국인은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인해 일본 기업에 더 높은 가격을 지불했으니 국가적으론 결국 손해는 없었던 것이었다.

강한 엔화에 힘입어 일본 생산자들은 더 저렴한 비용으로 수입 시장에 접근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섬들로 이뤄진 일본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천연자원이 부족한 국가로 분류된다. 내수 경제 측면에서도 엔고(円高)는 생산자들이 판매 가격을 유지하면서 외국 자원에 대한 저렴한 접근을 가능하게 해줬다. 일본인 관광객이 한국의 명동 거리를 가득 채웠던 시기도 당시였다.

명동 쇼핑거리에 설치된 일본어로 된 간판들. 엔화 강세 시기에 비해선 다소 줄어든 모습이다. /연합뉴스

기업에는 이윤이 발생했고 소비자들도 많은 이익을 얻었다. 많은 일본인은 그들의 엔화로 세계를 항해할 수 있었고 높은 삶의 질을 이어갈 수 있었다. 2011년 10월, 엔화가 달러당 약 75엔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할 때 일본인 입장에선 엔화는 어떤 나라의 통화보다 강한 무기가 됐다.

특히 강한 통화는 다른 통화를 구매할 때 더 적은 단위를 사용해도 되는 장점을 가진다. 2000년 이후 10년간 일본 경제는 이러한 강한 통화 효과에 힘입어 평균적으로 GDP의 6%에 달하는 플러스 무역수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달러는 같은 기간 상대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미국의 무역 수지는 2008년 GDP의 최저치인 6%에 도달한 이후 뚜렷한 개선세를 보이지 못했다. 당시 미국처럼 쌍둥이 적자를 겪는 것도 아닌 일본이 엔고에 회의감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엔고 장점 포기하자 경제력 추락
1달러당 75엔→지금은 145엔대 
GDP 30년 만에 4조 달러 밑으로

그런데 디플레이션이 성장률을 떨어뜨린다는 인식은 이같은 상황을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1985년 플라자합의로 64% 높아진 엔화가치가 잃어버린 10년을 불렀다는 일본인들의 생각은 아베 총리가 G7 회의에서 아베노믹스란 이름의 무제한 양적완화를 선언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10년 넘게 진행된 양적완화의 효과는 지난 9월 22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절정을 보여줬다. 플라자합의 37년 만에 엔화값이 장 중 한때 달러당 145.89엔으로 기록적인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같은 통화 약세는 일본의 경제력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은행이 달러를 팔고(매도) 엔화를 사는 시장 개입에 24년 만에 나섰지만 결국 시늉에 불과했다. 30일 기준 엔화 가치는 1달러당 144.39엔으로 양적완화 이전 대비 절반 가까이 추락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후미오 기시다 정부는 양적완화 노선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 시내의 환율 전광판 앞에 행인들이 서 있다. 22일 일본 중앙은행이 엔저를 저지하기 위해 1998년 이후 처음으로 외환시장에 개입하면서 달러당 140엔대까지 회복했던 엔화 가치는 이날 144엔대로 후퇴했다. /연합뉴스

엔화의 걷잡을 수 없는 추락으로 일본은 올해 세계 3위 경제대국 자리마저 독일에 내줄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달러당 엔화 가치가 140엔 수준을 유지하면 올해 달러 기준 일본의 명목 GDP가 3조9000억 달러(약 5421조원)로 30년 만에 4조 달러를 밑돌 것이란 분석을 내놨다.

미국이 일본과 함께 통화 약세 경쟁을 함께 펼쳐주던 때도 있었다. 버락 오바마 2기 정부(2013~2016)와 트럼프(2017~2020) 집권 기간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까지 검토하던 이 당시엔 엔화 약세에 따른 부작용이 눈에 띄지 않았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출구전략을 취하자 물이 빠지고 나니 바닥이 드러나듯 현실로 나타났다.

파월 연준 의장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고강도 긴축을 펼치면서 강달러 시대는 자연스럽게 도래했다. 일본 정부가 터무니없는 엔화 디스카운트를 추진하기 위해 마이너스 물가상승률을 플러스로 올리는 목표를 잡은 것과는 정반대 정책이었다.

 

미국과 일본의 통화정책 기조 변화. 조지 부시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기까지 두 국가는 같은 기조의 통화정책을 펼쳐 왔으나 조 바이든 대통령이 강달러 정책으로 선회하면서 엔화 가치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료·분석=여성경제신문

일본의 과잉 통화 정책 결과는 참혹했다. 올해 1분기 일본 재무성은 국채와 차입금 등을 합친 일본 정부의 빚은 1017조1072억 엔으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4분기 기준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부채 비중이 247.3%로 한국(45.6%)의 5.4배에 이른다. OECD 평균(80%)의 3배 이상으로 높은 수치다.

일본 정부 발행 국채의 약 1/2을 일본은행이 보유하고 있다. 중앙은행이 절반의 국채를 보유하는 것은 그동안 무제한 양적완화를 충당하기 위한 적자재정이 구조화된 것을 보여준다. 지난해 일본 정부는 전체 국가예산의 33.6%를 사회 보장비에 지출하고 22.3%는 국채를 상환하는 데 썼다.

정부 지출의 약 1/4은 순전히 빚을 갚는 데 쓰고 정부 예산의 약 1/3은 생산은 하지 않고 적자를 메꾸는 데 쓰이면서 평균적인 일본인들이 10년 전에 비해 더 가난해졌다. 구매력평가(PPP) 기준 1인당 GDP가 한국보다 뒤처질 수밖에 없었다.

 

원엔 환율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급락 추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 9월 20일 100엔당 원화 환율이 942원까지 떨어졌다. /여성경제신문DB

한국은 원화보다 엔화가 약세를 띠어야 일본보다 수출이 더 잘 돼 무역수지를 끌어 올릴 수 있는 지경학(Geo-economics)적 포지션에 있다. 그런데 원엔 환율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급락 추세다. 지난 달엔 원엔 환율이 950대로 내려앉으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본격화하고 있다.

과거 한국의 위기 사례를 봐도 엔화 대비 원화 가치가 상대적 강세를 보일 때 한국 경제엔 위기가 닥쳤다. 1997년 외환위기 전 1995년 5월~1997년 2월 중 원/엔 환율은 30% 절상됐다. 결국 1995년 80억 달러였던 경상수지 적자가 1996년에는 230억 달러로 확대됐다. 

2008년 외화유동성 위기 전에도 같은 현상이 일었다. 2004년 1월~2007년 7월 중 원/엔 환율은 47% 절상됐다. 이 결과 2004년에 323억 달러 흑자였던 경상수지는 2008년 1~3분기 중에는 33억 달러 적자에 빠졌으나,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했다.

성장 디플레이션 경험 없는 한국
日보다 환율 상승에 취약한 구조 

한국은 일본과 달리 강한 통화와 성장 디플레이션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나라다. 원화 약세에 따른 환율 급등은 곧바로 국부 유출로 이어지는 구조다. 그런데 문제는 주요 통화 중에서도 원화의 약세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지난 3분기 1290원으로 시작했던 원/달러 환율은 1440원대까지 치솟아 주요 통화 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하락세를 보여준 바 있다.

지난달 말(9월 30일) 기준 달러 인덱스는 영국의 감세 정책 우려감 완화와 유럽중앙은행의 긴축 강화 방침에 따라 0.33% 하락한 112 언저리에 걸쳐 있다. 또 이러한 영향으로 원달러 환율도 4.0원이 떨어진 1430원에 거래되고 있으나 지난해 말 대비 21.48%나 높은 수준이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강한 통화와 성장 디플레이션의 혜택을 누려보지 못한 나라다. 원화 약세에 따른 환율 급등이 곧바로 국부 유출로 이어지는 구조다. 지난 9월 28일 원·달러 환율이 1440원을 넘어서며 또다시 연고점 기록을 갈아치웠다. /연합뉴스

달러가 초강세를 보이는 상황에서 주요국 경기 악화로 수출이 둔화하고 대외 수지가 나빠지면서 원화 약세는 더 가파른 양상을 보였다. 한국의 7월 상품수지는 2012년 이후 10년 만에 적자로 돌아섰고 8월 무역수지는 94억7000만 달러 적자로 통계 작성 이래 최대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

특히 반도체 수출이 급격하게 쪼그라든 점이 원화 약세의 원인으로 진단됐다. 반도체 수출은 지난 8월부터 두 달 연속 전년 대비 역성장했다. 이와 관련해 여성경제신문은 [Fed의 역습]⑪ 환율 참사 불 지핀 尹경제라인 책임 어디까지? 편을 통해 한덕수 국무총리, 추경호 경제부총리, 최상목 경제수석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등 윤석열 정부 경제라인의 한미 통화스와프 실패와 원저(圓低) 책임론을 점검해볼 예정이다.

일본의 경우를 요약하면, 디플레이션을 잡겠다는 취지로 도입된 인플레이션 정책이 통화가치 하락과 경제를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일반적으로 디플레이션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디플레이션 상황에서는 경제성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플레이션 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반쪽의 진실일 뿐이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디플레이션에는 '불황' 디플레이션과 '성장' 디플레이션 두 가지가 있다"며 "만약 물가가 하락하면서 고용이 증가하고 생산이 증가한다면 오히려 사회적 후생이 증가하게 된다. 생산성 증가에 따른 물가하락을 바로 '성장' 디플레이션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