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옥 더봄] 가을은 역시 남자의 계절인가 봐

[홍미옥의 일상다반사] 밀물 같은 시간에 정신없이 일하다 썰물을 마주한 당신께 하고픈 말 같이 걸어봅시다, 나도밤나무처럼

2022-09-26     홍미옥 모바일 그림작가

굳이 흘러간 유행가를 들먹이지 않아도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 맞는 것 같다. 지루했던 여름이 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남편의 계절 타령이 부쩍 늘어진다. 찬바람이 부는 걸 보니 벌써 가을이라며 쓸쓸한 표정을 짓곤 한다.

 

가을은 역시 남자의 계절이다. /그림=홍미옥, 갤럭시노트20

남편의 주머니에서 나온 건 나뭇잎이 아니라 썰물 같은 시간의 아쉬움

 

산책 길에 데려온 가을 /사진=홍미옥

몇 년 전 갑자기 오십견이 찾아왔다. 난 그야말로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올 게 오고 말았다며 이런 상태로는 집안일은커녕 모든 게 귀찮다고 생떼를 쓰기도 했다. 즉 내게 갱년기가 왔으니 가족들 모두 내게 집중하라는 엄포 비슷한 거였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한동안 날 괴롭히던 오십견은 어느샌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어깨는 말짱해졌다. 나로 말하면 갱년기와 오십견을 핑계 삼아 맘껏 화풀이도 하고 한편으론 자유를 누린 셈이었다.

남편이 어느 날 내게 내미는 건 다름 아닌 노란 은행잎 몇 장이었다. 아니! 세종대왕 배춧잎을 다발로 줘도 시원찮을 판에 무슨 이런 이파리를 주느냐며 짐짓 핀잔을 줬다. 남편은 그냥 길을 걷다 수북이 쌓인 샛노란 은행잎이 이뻤노라며 식탁 위에 툭 올려놓았다. 그로부터 남편의 산책길에 함께하는 건 단풍잎, 은행알, 나도밤나무 열매, 강아지풀 등 다양하게 종류가 늘어만 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이뻐서 주웠다는 게 이유다. 다시 말하면 남편은 이딴 거(?)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한여름 거침없이 푸르고 무성했던 나뭇잎이 낙엽으로 변하는 게 맘에 걸렸던 걸까?

퇴직을 앞둔 남편의 마음이 가을 낙엽에 빙의되어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밀물 같은 시간에 정신없이 일하다 조용히 빠져가는 썰물의 시간을 마주하는 가장의 허탈한 어깨를 보는 것만 같았다.

중년의 사춘기나 갱년기가 마치 나의 전유물인 것처럼 때론 큰소리를 치고 어린냥(어리광의 제주 방언)을 부렸지만 사실 나도 알고 있다. 인생이라는 무지막지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남자의 그것도 못지않다는 걸. 아니 더 클 수도 있다는 걸.

같이 걸어봅시다. 못 먹어도 단단한 나도밤나무처럼 야무지게



나도밤나무처럼 단단하고 야무지게 인생의 가을을 마주하고 싶다. /그림=홍미옥, 갤럭시노트20

두툼한 도화지를 준비했다. 정성스레 나뭇잎을 올려놓고 그다음은 벽돌 두께의 책을 올리면 완성이다. 언젠가는 빛이 바래겠지만 당분간은 이쁨 장착이다. 소녀 시절에도 못 해 본 이런 이벤트를 하게 해주다니 고맙기도 하다.

남은 나뭇잎들은 작은 유리병에 넣어두었다. 그리고 남편이 주워온 나도밤나무 열매는 알밤 못지않게 단단하다. 윤기마저 자르르한 게 여간 야무진 것이 아니다. 비록 식용은 못 되지만 외관상으론 일등품이다.

우리도 젊음이라는 세포는 숭숭 빠져나가고 없지만, 마음만은 단단한 나도밤나무 열매처럼 야무지게 살아가면 되는 거 아닐까! 아! 가을은 이래저래 남자의 계절이라고 인정하기로 했다. 후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