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희 더봄] 리스본, 필연의 첫걸음

[박재희의 그랜드 투어] 자기 영혼의 떨림을 향해 있는지도 몰랐던 세상으로 설렘보다 큰 두려움의 길

2022-09-15     박재희 작가·모모인컴퍼니 대표

꿈꾸던 삶을 살고 있냐고 질문을 던졌던 영화가 있었다. 한 사람의 삶을 흔들어 통째로 바꿔버린 단 한 번의 기적같은 여행을 그린 영화. 나도 모르는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꿈꾸게 만든 발단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 열차』 동명 영화였다.

영화를 본 후로 난 시간만 나면 주인공 그레고리우스가 걸었던 골목길과 언덕을 찾아 구글어스로 리스본 구석구석을 더듬었다. 눈을 감으면 겨자색 노란 전차를 타고 알파마의 좁은 길을 빠져나가는 상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리스본 앓이’가 깊었지만 당장 일상을 접어두고 떠나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만고만한 책임과 의무가 목에 걸려있던 수많은 날 가운데 하루였던 어느 날, 습관처럼 무심하게 책을 펼쳤다. 숙명은 우연을 가장하고 삶에 불쑥 찾아든다고 하더니 책 속에 이런 구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

무엇에 홀린 기분이 되어 나는 휴가계를 내고 리스본행 비행기표를 예매했다. 

 

대항해 시대 리스본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벨렝탑 /게티이미지뱅크

리스본 명물 28번 트램에 올라 구불구불 언덕을 지나고 흡사 부딪힐 듯 마주오는 전차에 환호성을 지르는 관광객 놀이는 금방 시시해졌다. 세상에 행복의 맛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했던 에그타르트의 원조 파스텔 드 나타를 찾아다니는 즐거움도 거르게 될 때쯤 리스본이 사무치게 서러웠다. 왜 이렇게 아련하고 슬프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일곱 개의 언덕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는 낮고 붉은 지붕과 파란 하늘, 석회석을 갈고 쪼개 만든 문양으로 아름다운 보도블록에 아줄레주 타일과 그래피티로 장식된 벽면까지 이국적인 매력이 차고 넘쳤지만 사실 리스본에 온 첫날부터 화려하고 들뜨는 기분은 전혀 생기지 않았었다. 알파마 골목을 구석구석 걸을 때도, 가이드북과 셀카봉을 휘두르며 길을 메운 관광객을 헤쳐야 하는 명소거리에도 알 수 없는 서글픔과 고요가 흘러 다녔다.

그날 유난히 붉은 노을이 내려오고 있었고 리스본을 건너온 테주강이 바다를 만나는 것을 본 순간 나는 비로소 리스본을 감싸는 서러움의 정체를 알게 된 기분이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 필연이었다. 그러고보니 라틴어로 운명, 숙명을 뜻하는 파툼(Fatum)에서 유래되었다는 포르투갈 음악 파두(Fado)의 사우다드(Saudade), 즉 깊은 슬픔과 그리움, 체념이라는 정서와 같은 지점이기도 했다. 리스본에서 파두를 계속 들어서일까? 도시를 감싼 공기의 이름은 필연,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리스본 하면 사람들 열에 아홉은 ‘세계사를 바꾼 대항해 시대’를 말한다. 바스쿠 다 가마와 해상왕 엔리케 왕자에게는 유럽의 변방을 벗어나는 위대한 도전의 시대였겠지만 그 시대 민초들에게도 그랬을까?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세상을 향해 떠밀려야 했던 사람들, 보내야 했던 사람들,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 떠난 사람들을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 다른 선택지가 없는 필연이었다.

황금과 후추, 15세기의 슈퍼 파워를 향한 길이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그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을 것이다. 확신할 수 없는 완전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은 사실 설렘이 아니고 두려움이고 공포다. 세상의 끝이라고 믿는 항구를 떠나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로 향하는 운명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서러움이 어쩌면 아직도 리스본에 있다.

리스본은 1755년 어찌해 볼 수 없는 지진도 겪었다.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고 20만명이 목숨을 잃는 완전한 파괴에 의한 결별이었다. 홍등가와 빈민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는 경험은 자애로운 신을 믿는 세계를 떠나게 한 사건이기도 했다. 현재를 전복시키고 떠나야 하는 새로운 출발은 도전보다 체념을 필요로 할 때가 있다. 강요된 비극에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도전보다 체념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할 지도 모를 일이다.

도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 조르제 성 아래 언덕을 덮고 있는 붉은 지붕의 리스본 /게티이미지뱅크

해가 지고 리스본 언덕과 골목길에 노란 불빛 조명이 켜지면 파두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요된 선택이었다 해도 미래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를 바꾸는 한 걸음, 알 수 없는 세상을 향해 결국 운명을 바꾸는 시작은 첫 번째 한 걸음을 필요로 한다. 파스칼 메르시에가 그레고리우스의 입을 빌어 한 말도 그것이 아니던가.

‘확실한 것은,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무엇인가에서 떠나는 행동이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필연적인 첫 발걸음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