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웃는 새]① 반도체 전쟁 시작인데···국익 뒷전 韓 경제정보법
美 칩4 가입 요구에 고민 깊어진 尹정부 해외 스파이에 무방비···산업기술보호법 반도체 특별법 등 산발적인 대책만 남발 경제안보 강화, 칩4 전략 동시 추진 필요
냉전시대에도 경제 경쟁은 존재했다. 오늘날은 정치·군사 경쟁이 경제 경쟁으로 옮겨간 것뿐이다. 경제문제에서 우리는 모두 경쟁자이다. - 피에르 마리용 프랑스 DGSE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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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새(笑鳥, The Laughing Bird) 작전. 1980년 중앙정보부를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한 전두환 정부가 펼친 건국 이래 최초 경제정보 수집 활동을 말한다. 재일동포들의 적극적인 협조 결과 일본 정부의 극비리 에너지 프로젝트인 '선샤인 공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미국이 별들의 전쟁이라 불리는 전략방위구상을 발표하기 3년 전의 일이었다. 반세기 만에 신냉전이 돌아왔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이 중국과 러시아 압박 카드를 쏟아내고 우크라이나 전쟁도 내년까지 이어질 전망이다. 국제통상 지형도 양자(兩者)에서 다자(多者)·진영(陣營) 중심으로 이동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이같은 신냉전을 '경제 전쟁'이라고 표현해 왔다. 한국 정부는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와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시도 중에 있었다. 이런 가운데 '칩4'로 표현되는 경제 동맹이 최대 변수로 떠오르면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최선의 답안을 찾는 것이 오늘의 과제다. 다만 이를 뒷받침해야 할 국내 경제안보법제는 매우 미비한 실정이다. 해외정보기관의 스파이 침투 등에 무방비한 법제로 인해 미·중 보호무역주의에 끌려다니기만 할 판이다. 여성경제신문이 반도체 세계 대전과 함께 본격화하는 경제정보 전쟁의 상황을 살펴보고 돌파구를 모색해본다. [편집자주] ① 반도체 전쟁 시작인데···국익 뒷전 韓 경제정보법 |
반도체 공급망을 둘러싼 세계 대전이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국익을 제1순위로 하는 수싸움이 치열하다. 냉전(The Cold War)은 끝나지 않았다. 단지 경제영역으로 전장(戰場)이 옮겨졌을 뿐이다.
8일 정치권에 따르면 미국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 방한을 계기로 미국이 구상한 반도체 공급망 동맹 가입 압력이 거세지고 있다. 대통령실 안팎에서도 논쟁이 격화하는 중이다. 정부가 "칩4에 가입 안 할 거냐"는 질문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자, 안철수 국민의힘 의원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추진을 요구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는 입장이다. 최상목 경제수석은 "업계 의견이나 여러 상황들, 정부 부처 간 논의를 통해 국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결정을 내릴 계획"이라는 소극적 자세를 보이고 있다. 실무 담당자 왕윤종 경제안보비서관도 지난달 미국을 다녀온 뒤로는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외교부가 미국의 설명을 들어보자는 취지에서 예비회의 참가 의사를 표시했지만 '경제동맹' 개념과 맞물려 정책 혼선이 심화되고 있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제안한 '칩4' 동아시아 반도체 공급망 네트워크엔 일본·대만과 함께 한국이 포함된다. 미국 정부가 우리에게 통보한 ‘칩4’ 가입 결정시한은 8월 말이다. 구체적으론 △시스템 반도체 설계에 강점이 있는 미국 △메모리와 파운더리 강국이자 경쟁 관계인 한국과 대만, 그리고 △첨단소재 강국인 일본이 협력해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을 구축하자는 취지다. 그런데 중국을 견제하는 동맹으로 해석되는 것이 정부의 고민이다.
新 냉전 보완해야 할 제도 장치 빈약
美 9개 조문만으로 경제간첩법 잡아
정부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 수출 비중이 60%를 넘는 상황에 모든 거래를 중단하게 될 위험성이 크다고 본다. 그런데 이러한 딜레마를 제도적으로나마 뒷받침해야 할 국내 경제안보 법제는 매우 빈약한 실정이다.
정부는 지난 4일부터 반도체 특별법이라 불리는 '국가전략산업 경쟁력 강화 및 보호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시행하고 있다. 반도체·배터리 등 첨단전략산업을 정부 차원에서 지원하고 기술 유출을 막자는 취지지만 다른 업종과의 형평성의 문제와 함께 미션 크립(Mission Creep) 논란까지 제기되고 있다.
'미션 크립'이란 처음 설정한 목표에 또 다른 목표를 추가하면서 새 과제를 더해야 하는 부담스러운 상황을 뜻하는 용어다. 예를 들면 미국처럼 경제간첩법(EEA) 하나만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을 이직 제한 규정이 포함된 반도체 특별법을 추가로 내놓으면서 위헌 시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반도체 특별법 14조는 전략기술 전문인력으로 분류된 직원은 퇴직 후 일정 기간 다른 회사로의 재취업을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밖에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요청할 경우 법무부가 출입국 정보를 제공해야 하는 규정도 헌법상 기본권을 위협할 소지가 있다.
반면 1996년 경제간첩법제(economic espionage)를 완비한 미국은 지난 28일 상하원 주도로 반도체 산업에 정부가 68조원을 직접 투자하는 반도체 과학법을 통과시켰다. 동시에 기술 및 인재 양성에 2800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미국은 클린턴 행정부 때부터 '무관용의 원칙'에 따라 산업스파이를 엄단하고 있다. 경제간첩 행위를 '형사범죄'로 규정해 전문 수가기관인 연방수사국(FBI)과 중앙정보국(CIA)이 해당 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반면 국내 경제안보 법제는 2007년 도입된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과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에 따라 산업기술침해·영업비밀누설시 처벌 규정은 두고 있다.
다만 경제 간첩에 대한 개념 규정조차 안 되다 보니 실질적인 위협이 되는 외국 정보기구나 해외스파이 조직에 대한 대비책은 무방비한 상태다. 우선 경제 방첩에 특화된 미국의 CIA와는 달리 국가정보원에는 수사권이 없다. 특정 기관이 국가핵심기술을 승인 신고 없이 수출한 경우 산업부 장관이 검찰과 경찰에 '조사의뢰'를 할 수 있도록 되어 있을 뿐이다.
한희원 동국대 법대 교수는 "단 9개의 조문으로 구성된 미국 경제간첩법이 해외정보기관과 적대세력으로부터 경제안보를 수호하기 위해 탄생한 것에 비하면 한국의 산업기술보호법 등은 피용자 등 회사 내부의 관계자를 정보침해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며 "오히려 기업에만 부담을 줄 위험성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고 지적했다.
반도체 과학법 '칩4전략'과 연동한 미국
경제안보로 확장된 동맹 개념 점검해야
미국 의회를 최근 통과한 반도체 과학법은 중국 추가 투자 금지가 골자다. 해외기업 투자유치를 위해 재산세 감면과 보조금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법안 통과에 앞서 미국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 11곳을 신·증설하기 위해 250조원을 투자하겠다는 잠정 계획안을 미국 정부에 제출한 것도 이같은 혜택과 맞닿았다.
번면 한국에선 "국내 핵심인력 보호조치는 기업 간 인력 이동을 제한하는 정도에 머물고 있다"는 재계의 볼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익 차원에서 반도체 과학법을 칩4 동맹 전략과 연동시키며 일자리 창출까지 이어가는 미국과 비교해 기본적인 방향도 잡지 못해 좌충우돌하는 정부 역량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는 양상이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여성경제신문과의 통화에서 "동맹(alliance)이 경제영역으로 확장돼 사용되면서 윤석열 정부도 고민이 많아진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칩4가 동맹이 되려면, 하나의 국가가 공격받을 경우 나머지 세 국가가 연합해 반격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이어 "또 동맹에 불참할 경우 대만과 TSMC가 모든 이익을 챙길 것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민주국가와 독재국가가 진영화되면서 반도체·배터리·5G와 같은 경제안보적 함의가 있는 핵심산업에 대해 가치 동맹 국가(like minded country)들이 전략적 유대를 가지는 것은 국익에 합당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