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d의 역습]④ 버블 붕괴 템플릿 : 닷컴과 모기지의 배신

저금리에 주가‧부동산 폭등‧고금리에 폭락 연준 금리 정책 악순환에 버블-침체 반복

2022-08-06     최주연 기자

“돈을 빌리는 순간 부채 사이클이 시작된다” <원칙> 저자 레이 달리오.

반세기 만에 스태그플레이션 시대가 돌아왔다.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이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 금리를 0.75% 포인트 인상한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비둘기파로 분류되는 파월에게 레이건 시대 폴 볼커의 역할을 요구할 만큼 글로벌 경제가 급변하고 있다.

앞으로도 연방준비제도(Fed)가 볼커를 소환해 초고강도 금리 인상을 계속한다면 어떻게 될까? 당시 소련과 동유럽이 겪었던 위기는 비기축통화국인 신흥국에 곧바로 닥칠 전망이다. 국제금융시장에서 자동현금인출기(ATM)로 불리는 한국도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국내외 경제는 1970~1980년대와 데칼코마니 양상이다. 여성경제신문이 당시와의 유사점을 살펴보고 미국의 긴축 정책이 국내외 경제에 미칠 영향을 다섯 차례에 걸친 시리즈로 짚어본다. [편집자주]

① 반세기 만의 스태그플레이션과 자이언트 스텝
② 반복하는 위기···한국 1970년대와 뭐가 다른가
③ '회색코뿔소' 앞에 선 파월, 고용 믿고 경제위기 부정
④ 버블 붕괴 템플릿 : 닷컴과 모기지의 배신
⑤ 코로나19 사태 떠나가는 외국인들

버블 붕괴는 ①저금리→②기대감 증폭(가격 상승)→③금리 인상→④가격 폭등→⑤버블 붕괴→⑥침체→⑦금리인하 사이클을 거친다. 이 공식은 전 세계‧전 시기에 적용된다. 사진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당시 시위 모습. 글로벌 경기 침체로 세계 경제 성장률은 -1%대를 기록했다. /AP=연합뉴스, 여성경제신문 재편집.

미국 경제는 가격 폭등과 버블 붕괴의 역사다. 21세기 들어 거행된 세 차례의 무지막지한 돈 풀기(저금리 정책)는 주가, 부동산 가격, 그리고 물가를 치켜올렸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는 인플레이션에 반응한다. 인플레 빨간불이 들어오면 어김없이 연준이 돈을 거뒀고(고금리 정책) 풍성했던 버블은 꺼지기 시작했다. 이후 미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는 침체 쇼크에 빠졌다.

버블 붕괴는 ①저금리→②기대감 증폭(가격 상승)→③금리 인상→④가격 폭등→⑤버블 붕괴→⑥침체→⑦금리인하 사이클을 거친다. 이 공식은 전 세계‧전 시기에 적용된다.

닷컴의 배신‧‧‧인플레 파이터 연준의 금리인상


2000년 3월에 촉발된 ‘닷컴 버블(dot-com bubble)’은 버블 붕괴 사이클의 전형이다. 인터넷의 폭발적인 성장으로 1995년과 2000년 사이 미국 등 세계 여러 국가의 주식시장에서는 IT 벤처기업에 광적인 투기 현상이 일어났다. 싼 금리 덕에 누구든 얼마든지 투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선 IT기업 주가에 대해 ‘다신 꺼지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이 기간 나스닥 종합지수는 400% 상승했다.

그러나 시대적 한계가 버블을 꺼트린다. 너무 느린 인터넷 속도가 해결되지 않았던 것이다. 1999년 당시 인터넷망은 56k 모뎀이나 케이블 선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웹 서비스에 대한 실망과 불신이 커짐과 동시에 금리마저 오르고 있었다. 연준이 움직인 것이다. 1998년 1월 1.7%였던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000년 1월 8일 4%대를 넘볼 만큼 올라섰기 때문이다. 1980년 최악의 물가(14.80%)를 겪은 미국은 고물가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연준은 1999년 6월 30일 종전 기준금리 4.75%에서 0.25%포인트 인상해 5.00%로 상향조정 한다. 이후 1년여 간 1.75%포인트를 올려 2000년 5월 16일에 미국 기준금리는 6.50%가 된다.

2000년 3월에 촉발된 ‘닷컴 버블’은 버블 붕괴 사이클의 전형이다. /자료=나스닥 여성경제신문 재구성.

당시 앨런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비이성적 과열은 자산 가격을 과도하게 상승시키고 이로 인해 일본이 경험한 것과 같은 예기치 못한 장기간의 경기침체를 초래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금리 인상과 더불어 IT 주가는 폭락을 거듭했다. 2001년 시장이 본격적으로 붕괴해 투자자들은 총 5조 달러 손실을 입은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나스닥 지수는 2000년 3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고점 대비 78% 가까이 하락했다. 당시 Cisco와 퀄컴은 주가가 86% 하락, 아마존도 2년 동안 96% 급락했다.

전 세계적인 닷컴 버블 붕괴가 일어났고 특히 본거지인 미국을 비롯해 한국과 독일에 파장이 컸다. 버블 붕괴 이후 코스닥 시장에선 IT 테마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골드뱅크, 장미디어 등 대부분 IT기업 주식이 상장폐지 됐다. 2003년 한국의 코스닥 격인 독일의 노이어 마르크트(New Market)는 당시 충격으로 지수 자체가 없어졌다.

닷컴 버블 붕괴는 세계성장률을 2%대로 주저앉혔다. 이뿐 아니라 2001년 9월 발발한 9.11 테러는 세계 경제를 크게 위축시켰다. 연준은 2001년 초부터 2004년 6월까지 3년 6개월간 가파른 금리인하(총 5%포인트 인하)로 경기침체에 대응했다.

통화 수도꼭지를 제때 안 잠근 참사 ‘버블’


미국이 금리인하기에 들어서자 한은도 이에 동조한다. 한은은 2001년 2월부터 금리를 인하해 시장에 풍부한 유동성을 공급, 견조한 경제성장률을 이뤘다. 2001년 한국 경제성장률은 4.9%였는데, 이는 중국(8.3%)를 제외하면 높은 수준이었다.(미국 1%, 일본 0.4%)

문제는 위기 대응 이후에 금리를 정상화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한은의 금리인하는 2004년 11월(0.25%포인트 인하)까지 지속됐고 기준금리를 3.25%까지 떨어뜨렸다. 이는 부동산 및 가계대출 버블로 나타나게 된다. 2001년 말 수능시험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2002년 연초부터 학원가가 밀집한 강남 대치동 지역을 중심으로 아파트 가격이 급등했다.

2002년부터 은행권의 가계대출이 전년 대비 50%씩 폭증하면서 가계대출 버블이 시작됐다. 금융당국은 기준금리를 정상화하지 않았고, 02년 1월 기준 주담대 규모는 32조원이었으나 05년 10월 62조원을 돌파했다. /자료=한국은행, 여성경제신문 재구성.(단위=천억원)

2002년부터 은행권의 가계대출이 전년 대비 50%씩 폭증하면서 가계대출 버블이 시작됐다. 가계저축률은 떨어졌고 경기 불황에 대한 완충장치가 거의 없는 취약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

당해 가을부터 부동산 버블의 근본 원인이 저금리라는 주장이 나왔지만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부동산 버블 문제없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정부는 그로부터 3년이 지난 2005년 10월에도 통화정책 수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승 한국은행 총재도 “금리정책을 부동산 가격 안정에 주안점 두고 운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집했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본지에 “저금리와 유동성 공급으로 자산 버블이 형성됐다”면서 “버블 형성 혹은 붕괴는 금리 정상화 과정이 늦을 때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부동산 버블은 17개월이 지난 2007년 3월, 금융당국이 DTI 규제를 강력하게 도입한 후에야 겨우 확장을 멈췄다. 부동산 버블 한복판에 있던 한국은 이듬해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게 된다.

정부 암묵적 동의에 은행은 ‘신불자’도 대출
가계 빚으로 부푼 부동산 거품 한순간 ‘펑’


“메릴 린치가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 매각됐다”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했다”

2008년 9월 전 세계에 이 충격적인 소식이 퍼졌고 모두가 미국의 금융위기를 알게 됐다. 신용자(프라임)도 신용불량자(서브프라임)도 모기지(주택담보대출)를 받아 부동산에 투자하면서 발생한 거품이 마침내 붕괴한 것이다.

버블 붕괴 그림자는 2001년 연준이 통화를 풀어댈 때부터 미국 전역에 잠복해 있었다. 버블 붕괴 사이클은 저금리 정책에 사람들이 빚을 내는 순간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버블 붕괴 그림자는 2001년 연준이 통화를 풀어댈 때부터 미국 전역에 잠복해 있었다. /자료=미국 연방주택금융청(FHFA), 여성경제신문 재구성.

21세기 초 닷컴버블 붕괴와 9.11 테러에 대한 침체로 경기부양책이 필요했다. 그린스펀 연준 의장은 2000년 5월 6.5%였던 기준금리를 이듬해 1월부터 빅컷(기준금리 0.5%포인트 인하)으로 대응해 나간다. 2001년 1월부터 2년여 동안 기준금리는 5.5%포인트 미끄러지듯 내려갔고, 2003년 6월 25일 기준금리는 1.0%였다.

가계 대출은 부동산으로 몰렸고 집값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대출 상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집값은 매달 전년 대비 10% 이상씩 올랐다. 금융권에서는 신용불량자도 돈을 빌릴 수 있는 고위험 주택담보대출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패니메와 프레디맥과 같은 GSE(국책 주택담보금융업체)는 채무자가 상환불능에 빠져도 100% 보증을 해줬다.

그러나 대출이 증가하는 만큼 연체율도 증가했다. 상환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출해준 대가였다. 게다가 미국은 이미 금리인상기에 있었다. 소비자물가가 상승하자 연준은 어김없이 등장했다. 금리는 2004년 6월 1.25%에서 2006년 6월 5.25%까지 올랐다.

진짜 위기는 더 이상 집 구매자가 늘지 않으면서 본격화됐다. 2007년 1월부터 부동산 가격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집값은 구입한 가격보다 떨어졌고 이자도 너무 높았다. 대출금을 갚을 수 없게 되자 서브프라임 대출 이용자들은 담보로 잡힌 주택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거듭된 폭락세에 2007년 9월, 부동산 버블이 붕괴했다. 2008년 11월에도 미국 집값은 매달 전년 대비 –10%씩 떨어졌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리먼 브라더스, 메릴린치 뿐 아니라 AIG와 같은 서브프라임 관련 회사들이 파산하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됐다. 사진은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서 2007년 8월 9일 '모기지 위기가 전 세계로 번진 날'이라고 보도된 모습. /WSJ 홈페이지

돈을 빌린 사람도 돈을 빌려준 투자은행과 금융기관은 공황에 빠졌다. 리먼 브라더스, 메릴린치 뿐 아니라 AIG와 같은 서브프라임 관련 회사들이 파산하거나 다른 회사에 인수됐다. 금융 시장은 얼어붙고 달러화 가치는 급락했다.

미국과 교역이 긴밀했던 국가들은 타격을 입었고 당시 세계 성장률도 -1%를 기록했다. 이 기간 미국은 물론 스페인, 영국 등 일부 유럽 선진국과 동유럽 국가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는 지속적으로 증가했고 자본유출도 심화됐다. 특히 관광업에 의존했던 그리스가 경제 성장률 급감으로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됐다. 

대침체 시대 도래…버냉키 “돈 뿌려 경기 부양할 것”
제로금리 시대 연 美…韓은 외화자금 유출 방어 총력’


“주택 압류율, 사상 최고 기록” 2007년 9월 7일 <뉴욕타임스>

“외국인, 미국 증권 매도 중” 2007년 10월 17일 <블룸버그>

“실업률 상승, 일자리 8만개 감소” “유가 상승, 식료품 가격 상승” 2008년 4월 4일

2007년 9월 부동산 버블 붕괴 이후 서브프라임 모기지 이용자들은 거리로 나와 정부에 “사람들을 구제하라(Bail Out People)”고 연일 외치며 시위했다. 내 돈이 아닌 빚으로 집을 소유했던 사람들은 주택도, 직업도 잃었고 물가 상승에 당장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워졌다. 정부와 금융당국의 저금리 정책과 대출조건 완화가 사람들의 삶을 오히려 곤궁하게 만든 것이다.

패턴을 보면 연준이 금리를 내려 저금리를 유지하면 붐(boom)이 일어나 버블이 형성됐다. 이후 버블을 인식하고 금리를 인상하면 저금리로 형성된 버블이 붕괴되며 버스트(bust)가 왔다. 2001년과 2008년 불황은 연준이 인위적인 붐을 만들기 위해 금리를 인하하면서 예고된 것이었다.

2000년대 미국 연준 수장이었던 벤 버냉키 의장(왼쪽)과 앨런 그린스펀 의장(오른쪽)은 각각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와 닷컴 버블 붕괴를 겪었다. 2001년과 2008년 불황은 연준이 인위적인 붐을 만들기 위해 금리를 인하하면서 예고된 것이었다. /연합뉴스

이와 같은 두 번의 붐-버스트 사이클을 경험했으면 버블이 사라질 때까지 냉각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낄 만도 했다. 그러나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의장은 이를 참지 못하고 양적완화로 대응했다.

버냉키 의장은 “헬리콥터에서 달러 뿌려서라도 경기 부양하겠다”는 발언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리먼 브라더스 도산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금리를 낮췄다. 대출 상황에 대한 부담을 감소시키고, 경제 전반의 충격을 최소화한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버냉키 의장 지휘 아래 연준은 기준금리를 2007년 9월 17일까지도 5.25%였던 기준금리를 9월 18일 0.5%포인트 인하해 4.75%로 낮춘다. 이후 지속적으로 금리를 낮춰 2008년 12월에는 제로금리 시대(0~0.25%)를 연다. 제로금리는 재닛 옐런 의장이 연준 수장이었던 2016년 말까지 지속된다. (이는 또 다른 버블 붕괴 사이클을 시작하는 계기가 됐다.)

돈 풀어도 달러는 강세···韓 자본유출 타격

미국이 대침체를 방어하기 위해 양적완화 정책을 쓰는 동안 한국은 외화자금 유출 방어에 집중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신용경색 현상이 심화되면서 외화자금의 유입이 갑자기 중단되거나 유출되기 시작한 것. 원‧달러 환율은 2007년 말 936원에서 2008년 말 1260원으로 26% 상승했다. 2009년 2월에는 1570원까지도 오른다.

한국은행이 외환시장에 약 600억 달러(총 외환보유고의 20% 이상 규모)를 매도, 스무딩 오퍼레이션을 시도했지만 환율 오름세는 진정되지 않았다. 시장은 환율이 앞으로 더 오를 것이라고 본 것이다. 

한국은 2008년 10월 한미 교섭으로 외환위기는 넘어갈 수 있었다. 한미 통화스와프(2020년 2월 종료)가 성사된 것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미국과 교섭을 통해 300억달러 원‧달러 통화 스와프를 체결할 수 있게 됐다. 이어 한-중, 한-일 간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총 900억 달러 상당의 비상시 여유 외환을 확보할 수 있었다.

통화 스와프 체결 이후 한은은 기준금리 인하에 나선다. 2008년 10월 시작한 금리인하 기조는 2010년 7월까지 지속되며 2%대까지 내려갔다. (이는 또 다른 버블을 동반하고야 말았다.)

금융당국은 통화 스와프 체결 이후 2008년 10월부터 2010년 7월까지 금리를 인하해 2%대까지 하향조정한다. 양적완화로 지금의 스테그플레이션 상황을 만드는데 작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사진은 지난 7월 16일 원달러 환율이 1326원을 돌파한 모습. /연합뉴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명예교수는 "통화스와프로 위기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당시의 유동성 공급이 지금까지 이어져 스테그플레이션 상황까지 이어졌다"며 "많은 정치인이 통화량 증가는 비즈니스에 좋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만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은 해법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문제"라고 지적했다.